이전 이야기, 나르시시스트 죄책감 없이 상대를 이용하는 이유
양심을 지닌 사람들은 무양심 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는 양심 없이 타인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이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자주 혼란에 빠진다. “저 사람에게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말해도, 미안함이 없는 표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난감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심이 없는 사람에게서 내가 인정이나 사과를 받으려고 애쓰다가 스스로 무너지지 말자”라는 점이다. 그저 “이 사람이 내 아픔에 공감하고, 죄책감을 느껴서 스스로 바뀌어 주리라”는 기대만 하다 보면,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무양심자와 교류하면서 계속 상처받는다면,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래도 화해하면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낙관적 기대만 붙들고 있다가, 나만 더 지쳐 버릴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를 바꾸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능숙하고, 처벌도 교묘히 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예컨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도저히 개선될 여지가 없을 땐 관계를 끊거나 범위를 최소화해야 한다.
또 한 가지 필요한 점은, “이들의 언행 때문에 내가 죄책감을 과도하게 가질 필요는 없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무양심자는 굉장한 말솜씨로 오히려 나를 죄책감에 빠뜨린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못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어.” 그러면 양심이 있는 사람은 순간 “정말 그런가?”라고 믿어버리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상대가 내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에서 “설마 내가 100% 잘못은 아니었을 텐데?”라고 생각된다면, 스스로를 공격하기보다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객관화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결국, 양심이라는 제7감은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고 나 자신 역시 반성할 줄 아는” 놀라운 능력이다. 무양심자는 그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아예 지닌 적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양심을 버리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다. 양심을 지킨다는 건 곧 나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합리적인 경계선을 긋고, 내 마음을 함부로 흔들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나르시시스트에게 특별히 “얼음 같은 공허함”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 공허함이 왜 우리에게 상처로 돌아오는지 조금 더 다룰 예정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관계에 얽힌 실제 일화와 구체적 예시를 통해 “무양심자와 나르시시스트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히고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독자들은 “양심이라는 제7감”이 인간관계의 어떤 지점에서 생명줄 역할을 하는지 체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보이는 무양심행동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고 의문을 품은 일이 있었다면, 이번 글이 조금은 실마리를 주었으면 한다. 이들은 죄책감이라는 감정 자체를 잘 느끼지 않거나, 느껴야 할 순간에조차 훌쩍 건너뛰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걸 모르면 “내가 뭔가 부족해서 이렇게 냉대받는 걸까?”라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아마 그들은 “네가 불편해해도, 그건 네 문제야”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양심 있는 사람들은 “아, 이건 내가 바꿔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라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양심이란 본디 관계를 회복하고 성장시키는 촉진제지만, 무양심자에게는 소용없는 개념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거기서 “이건 저 사람이 해결해야 할 영역”이라고 선을 그으며, 내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나르시시스트가 정말로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오길 바라는 마음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본인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우리 스스로는 “제7감”을 소중히 여기며,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고, 필요하다면 대인관계를 재정비할 권리가 있다.
양심은 인간이 “잘못을 바로잡고, 타인을 돌보며, 자기만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근본 장치다. 그 반짝이는 내면의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 파괴와 주변의 배척, 결국 진정한 의미의 연결 부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나르시시스트와 소시오패스가 보여 주는 막무가내식 태도는 그저 잠깐의 이익과 자기만족을 선사할 뿐, 깊은 유대나 진정성 있는 사랑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이번 글이 “양심은 타고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라는 물음에 대해 어느 정도 시야를 확장해 주었으리라 기대한다. 누군가는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잘못했으면 사과하라고 배웠다”며, 이게 결국 양심을 학습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내게도 양심의 소리가 있긴 하지만, 자주 무시해 왔다”고 고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소리를 계속 외면하다 보면, 나르시시스트처럼 변해 갈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양심을 ‘인간다움’과 연결해, 스스로를 다잡고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조금 더 길게 보면, 이 양심이라는 제7감이 깨어 있는 한, 비록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도 다시 수정할 기회가 생긴다. 잘못을 깨닫고 책임을 지며, 상대와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하는 모든 과정은 양심에서 출발한다.
나르시시스트나 소시오패스에게 그 기제가 희미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품으려고 애쓰기보다, 내 삶을 보호하고 내 주변 소중한 사람들과 건강한 교류를 만들어 나가는 쪽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양심을 지키면서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강조하자면, “양심은 인간됨의 기본이면서, 사회적 유대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누군가 이 감각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굳이 그들 방식을 따라갈 이유는 없다.
도리어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라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양심이 주는 인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성숙한 선택이다. 설령 양심 때문에 내가 불편해지고 반성해야 할 일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나와 내 주변을 더 인간답게 지키는 근본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다음 장에서는 나르시시스트의 내면, 특히 얼음같이 차가운 감정 상태와 그 공허함에 대해 살펴본다. 이 차가움이 단순히 “성격이 싸늘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공감능력 부족과 죄책감 결여가 결합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 이들은 가면 뒤에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은 얼어붙은 듯 상대를 소모품처럼 대하는지, 그리고 피해자는 어떤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잃어가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무양심”이 실제 관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양심이라는 제7감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유지시키는 반석임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런 귀중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도 떠올려 보자.
그러나 이 감각을 제대로 알고 지킬 수 있다면, 부당함에 맞서거나, 내 삶을 더 건강하게 꾸려 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죄책감”이 무작정 괴로운 감정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와 상대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 기제이자,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신호”라고 이해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나르시시스트와 소시오패스에 의해 그 소중한 감각이 흔들릴 때면, 과감히 “내 양심은 타인의 무책임을 덮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정 나를 지키고, 나아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지향할 수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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