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서 그렇다는 변명
주말 오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약속을 앞둔 참이다. 현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뒤에서 팔짱을 낀 그가 혀를 찬다.
-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그런 옷 입고 나가면 이상한 사람들이 쳐다봐. 다 널 사랑하고 아껴서 해주는 말이야. 갈아입고 가.”
다정한 목소리인데 가슴이 턱 막힌다. 나를 아낀다며 건네는 그 말에 떠밀려, 결국 옷장에 걸려 있던 헐렁한 바지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통제와 간섭에 씌운 예쁜 포장지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간섭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타인의 옷차림, 인간관계, 시간표까지 입맛대로 쥐고 흔들면서, 그 명분을 ‘너를 향한 걱정과 애정’에서 찾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일상에는 보이지 않는 검열의 벽이 생긴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도, 옷을 고를 때도 ‘이걸 알면 그 사람이 또 나를 아낀다며 기분 나빠하겠지?’라며 혼자 수백 번 눈치를 본다. 헐렁한 바지로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애정이라는 핑계로 내 선택을 통제당했다는 불쾌함만 남기 때문이다.
내가 하면 사랑, 네가 하면 집착
그의 헌신적인 ‘사랑’은 오직 자신에게만 관대하게 적용된다. 며칠 뒤, 그가 밤늦게까지 술자리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 “밤이 너무 늦었는데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
조심스럽게 꺼낸 걱정에 그는 미간을 구기며 싸늘하게 대꾸한다.
- “나도 내 사생활이 있어. 왜 그렇게 사람을 숨 막히게 통제하려고 해? 너 집착이 심하다.”
자신이 치마 길이를 지적할 때는 나를 아끼는 사랑이었지만, 내가 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할 때는 피곤한 집착으로 둔갑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서로를 아껴주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가 불리할 때만 골라 쓰는 이기적인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깎여나가는 자존감
“다 널 위해서야.” 이 한마디는 반박하기가 몹시 까다롭다. 사랑해서 그렇다는 사람에게 선을 그으면, 졸지에 애정을 거부하는 매정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입을 다물고 그의 간섭을 수용할수록 내 안의 고유한 취향과 판단력은 자리를 잃어간다. 스스로 내리는 결정은 어설프고, 그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는 무언의 압박감이 일상을 채운다. 날 사랑한다는 사람 곁에 있는데도 자꾸만 내 모습이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기형적인 관계가 굳어진다.
무거운 변명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
또다시 찾아온 데이트 날. 약속 장소에 나타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가 입을 연다.
- “오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아니야? 넌 수수한 게 예뻐. 다 널 좋아해서 하는 소리야.”
예전 같으면 민망해하며 화장실로 가 립스틱을 지웠을 거다. 이번에는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 본다.
- “날 좋아해서 하는 소리라면 이제 하지 마. 내 화장은 내가 알아서 할게.”
당황해 굳어버린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먼저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숨을 조여오는 간섭은 아무리 예쁜 말로 덮어씌워도 사랑이 될 수 없다. 상대의 통제욕을 채워주기 위해 내 취향과 자존감을 깎아낼 이유는 없다. “널 사랑해서 그래”라는 그 묵직한 변명에 짓눌려 억지로 나를 바꿀 필요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길을 걸어가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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