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애가 늘 같은 방식으로 끝나는 이유

끔찍하게 익숙한 엔딩 크레딧

마치 삼류 로맨스 영화의 재상영관에 앉아 있는 기분일 것이다. 배우의 얼굴은 바뀌었다. 배경이 되는 도시도, 계절도, 그가 입고 있는 셔츠의 브랜드도 달라졌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다.

당신은 또다시 울고 있고, 상대는 또다시 침묵하거나 도망친다. 대사마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넌 너무 부담스러워.” 혹은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친구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당신의 불운을 위로한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식상한 격려를 던지거나,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냐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당신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의아해한다. 왜 내 인생에는 유독 똥차들만 줄지어 배차되는가. 왜 나는 매번 나쁜 남자, 혹은 회피하는 여자, 혹은 나를 갉아먹는 인간들만 골라내는 기이한 재능을 발휘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운이 나빴다거나, 남자(혹은 여자) 보는 눈이 없다는 말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은 게으르다. 당신의 연애가 늘 같은 방식으로 끝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연출하고, 주연 배우까지 캐스팅하여 완성해낸 필연적인 비극이다.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다. 당신은 이 지루한 비극의 총괄 디렉터다.

뇌는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호한다

우리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착각한다. 틀렸다. 인간의 뇌는 행복보다 ‘생존’과 ‘익숙함’을 우선순위에 둔다. 진화론적으로 낯선 쾌락보다는 익숙한 고통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고통은 대비할 수 있지만, 예측 불가능한 행복은 불안을 야기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 명명했다.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현재의 상황에서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뒤늦게나마 통제하고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우리는 극복하는 대신 그저 반복할 뿐이다.

당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만약 당신의 부모가 감정적으로 부재했거나, 변덕스러웠거나, 조건부 사랑만을 제공했다면, 당신의 뇌는 그 불안정한 긴장 상태를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다.

성인이 된 당신 앞에 안정적이고, 다정하며, 연락이 잘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의 이성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신의 본능은 하품을 한다.

  • “지루해.”
  • “설레지 않아.”
  • “섹시하지 않아.”

반면, 어딘가 그늘이 있고, 전화를 잘 받지 않으며, 당신을 애타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뇌의 보상 회로는 미친 듯이 반짝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에 땀이 난다.

당신은 이것을 ‘운명적인 이끌림’이나 ‘케미스트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신호가 아니다. 당신의 편도체가 “여기 내가 아는 그 익숙한 지옥이 있어!”라고 외치는 경고음이다.

당신이 나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익숙한 결핍을 다시 경험하게 해 줄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뇌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와 닮은 사람을 파트너로 선택한다. 그

래야만 어린 시절 실패했던 과업, 즉 ‘그 차가운 양육자로부터 사랑을 얻어내는 일’을 다시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이번에는 내가 내 사랑으로 저 사람을 바꿀 수 있어. 이 오만한 착각이 당신을 또다시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당신이 건넨 대본대로 상대는 연기한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더 뼈아픈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설령 당신이 운 좋게 건강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당신은 기어코 그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을 확률이 높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이는 마치 당신이 마음속에 이미 써놓은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상대방에게 건네주며, “자, 이 대본대로 연기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내면에 ‘나는 결국 버려질 것이다’라는 유기 불안(Abandonment Schema)을 가진 사람을 보자.

그는 연인이 조금만 연락이 늦거나 표정이 어두워도 “너 마음 식었지?”, “다른 사람 생겼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며 상대를 들볶는다. 처음에는 “아니야, 정말 바빴어”라고 해명하던 연인도, 반복되는 의심과 추궁에 지쳐가기 시작한다.

당신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확인받으려 하지만, 그 확인 작업 자체가 상대를 질리게 만든다. 결국 견디다 못한 상대가 “그래, 헤어지자. 너랑은 너무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라고 이별을 고한다. 그 순간 당신은 울면서 생각한다. “거봐, 내 예감이 맞았어. 결국 나를 버리잖아.”

하지만 그를 떠나게 만든 것은 예지력이 아니다. 당신의 불안이 멀쩡했던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밀어내고, 결국 떠나도록 조종한 것이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나를 버리는 배역’을 맡겼고, 그는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것은 관계가 아니라, 당신의 트라우마를 재연하기 위한 1인극에 가깝다. 상대방은 당신의 과거를 증명하기 위한 소품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당신은 상대방의 나쁜 점만을 유독 부각해 도발하기도 한다. 당신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분노나 자기혐오를 상대에게 투사한다. “너는 이기적이야”, “너는 나를 이해 못 해”라고 비난하며 상대를 공격한다.

계속해서 비난받은 상대는 방어적이 되고, 실제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냉담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안도한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나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증발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정 공방만이 남는다.

극장의 불을 켜고 걸어 나가는 법

당신의 연애가 늘 같은 결말을 맺는 것은 신의 저주도, 팔자 소관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익숙함에 중독되어 스스로 선택한 경로다.

당신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행복보다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남자는 다 똑같아”,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그 낡고 병든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불행을 자처한다.

이 지긋지긋한 도돌이표를 멈추는 방법은 단 하나다. 극장의 불을 켜는 것이다. 스크린 속의 환상에서 눈을 돌려,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내가 또 익숙한 패턴으로 가고 있구나.” “내가 지금 이 사람에게서 내 부모의 그림자를 찾고 있구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 사람이 사실은 가장 안전한 사람일 수 있겠구나.”

지루함을 견뎌라.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의 기복이 사랑이라는 착각을 버려라. 당신의 뇌가 “아니야, 이 사람은 느낌이 안 와”라고 거부하는 그 지점에, 오히려 진짜 관계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 당신이 굳이 노력해서 증명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그런 ‘재미없는’ 사람을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한다.

대본을 찢어라. 상대방을 당신의 과거를 재연하는 배우로 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타인으로 대접하라. 그 낯설고 두려운 작업을 시작할 때, 비로소 당신의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바꾸고 시즌 2로 넘어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끔찍하게 어색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루함이야말로 당신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