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받으러 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AI한테 이미 다 말해봤는데요. 많이 힘들었겠다고, 이제는 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내용을 입력했는지 물어보니 3년 동안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었다고 했다.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과정부터 연락 문제로 다퉜던 일, 상대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 시기, 마지막에 들었던 말까지 빠짐없이 썼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적고 마지막에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저와 헤어진 걸까요?”

돌아온 답변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사소통 방식으로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돌보고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려고 지난 3년을 다시 떠올리며 여섯 페이지를 쓴 것은 아니다. 사연을 쓴 사람은 중간에 울기도 했는데 답변은 고객센터 상담 종료 문구처럼 돌아온다. 그러니 “아, 뭐야. AI 구려. 뻔한 말만 하잖아.”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앞선 글에서 나는 AI에게 많은 정보를 줄수록 좋은 답변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반만 맞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관련 있는 정보가 구분되어 있을수록 답변이 나아진다.

사연의 길이와 상담의 깊이는 같은 단위를 쓰지 않는다.

사연의 길이와 질문의 선명함은 다른 문제다

긴 사연 안에는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들어간다.

상대가 실제로 했던 행동이 있고, 그 행동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이 있으며, 내가 붙인 해석도 들어간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이전 연애에서 있었던 일까지 적었다면 AI가 살펴봐야 할 방향은 더 많아진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이 “왜 이렇게 된 걸까요?”라면 AI는 무엇을 중심으로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상대가 이별한 마음을 분석해야 하는지, 두 사람이 반복한 갈등을 찾아야 하는지, 내가 불만을 참다가 터뜨린 행동을 살펴야 하는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AI는 긴 사연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몇 가지 주제를 골라 답한다.

소통 방식이 달랐고,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느 이별에 붙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답변이 만들어진다.

사람 상담에서는 사연을 들은 뒤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서운함을 참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화를 냈을 때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비슷한 갈등이 이전에도 반복되었나요?”

대답이 비어 있는 부분을 다시 묻는다. 말이 잠시 멈춘 지점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살펴본다. 처음에는 상대의 무관심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상대가 잘해줄 때 오히려 불안했다고 말한다면, 그 차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AI는 이런 질문을 먼저 하지 않고 빈칸을 그럴듯한 평균값으로 채워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사연을 입력한 뒤 바로 분석을 요청하기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아직 분석하지 말고, 이 관계에서 반복된 갈등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부터 해줘.”

AI에게 답변할 기회를 주기 전에 질문할 일을 먼저 시키는 것이다.

사연 안에 결론을 넣으면 AI는 그 길을 따라간다

AI 연애 상담, 사연을 말해도 뻔한 답만 돌아오는 까닭
AI 연애 상담, 사연을 말해도 뻔한 답만 돌아오는 까닭

우리는 사연을 있는 그대로 적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결론을 넣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은 회피형이라 갈등만 생기면 도망갔어요. 결국 저를 버린 거죠. 그래도 아직 마음은 있겠죠?”

이 문장에는 확인된 사실보다 해석이 더 많이 들어 있다.

갈등이 생긴 뒤 연락이 줄었다는 것은 행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행동이 갈등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간 것인지, 관계를 끝내기로 결정한 것인지, 반복되는 싸움에 지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대를 회피형이라 규정하고 “아직 마음은 있겠죠?”라고 물으면 AI는 그 전제를 따라 답하기 쉽다.

“회피형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이 답변을 읽으면 상대가 마음은 있지만 회피형이라 떠난 것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같은 사연을 두고 “그 사람은 이제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거죠?”라고 물으면, AI는 관계를 끝내려는 행동이 마음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 짧은 사이에 상대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다.

AI가 질문자가 세워놓은 표지판을 따라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론이 사연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면 사실과 해석을 나누어 달라고 해야 한다.

“내 사연에서 직접 확인된 행동과 내가 붙인 해석을 구분해줘. 내 해석과 다른 설명도 함께 제시해줘.”

이렇게 물으면 적어도 내가 느낀 확신이 사실에서 나온 것인지, 불안이 만들어낸 결론인지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위로와 분석과 결정은 서로 다른 일이다

“내 연애 상담을 해줘.”

이 말만으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AI가 알 수 없다.

오늘만큼은 내 편에서 실컷 욕해주기를 바라는지, 상대의 행동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싶은지, 연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받고 싶은지 알 수 없으니 AI는 가장 무난한 쪽을 선택한다.

먼저 감정을 인정하고, 자신을 돌보라고 말한다.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이런 답변이 도움이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숨이 트일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분석을 원했다면 원하는 일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지금은 위로보다 관계에서 반복된 패턴을 보고 싶어. 내 편을 들어주는 말부터 하지 말고, 정보가 부족한 부분을 먼저 질문해줘.”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선택지를 비교하게 할 수 있다.

“연락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나눠줘.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결론 내리지는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비교해줘.”

AI는 위로와 분석과 결정을 알아서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일을 한꺼번에 맡겨놓고 깊은 답을 기다리면, AI는 대개 듣기 편하고 책임질 필요 없는 이야기부터 꺼낸다.

긴 사연을 상담 자료로 바꾸는 방법

사연은 감정이 흐르는 순서대로 적어도 괜찮다.

처음부터 보고서처럼 정리하려 하면 오히려 쓰기 어렵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적고, 입력하기 전에 몇 가지를 덧붙이면 된다.

처음에는 사건의 순서를 알려준다. 언제부터 관계가 달라졌고, 이별 직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는다. 그다음 “상대는 항상 나를 무시했어요.”라는 평가보다 실제로 주고받았던 말과 행동을 넣는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적지 말고 그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함께 쓴다. 연락이 줄었을 때 계속 메시지를 보냈는지, 괜찮은 척하다가 한꺼번에 화를 냈는지, 이별을 말한 상대를 붙잡다가 약점을 찌르는 말을 했는지 말이다.

마지막에는 이번 대화에서 알고 싶은 것을 하나로 좁힌다.

그 사람이 아직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은 것인지, 내가 반복하는 관계 패턴을 보고 싶은 것인지, 연락하기 전에 감정을 정리하고 싶은 것인지 정한다.

잘 모르겠다면 아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

“아래 사연을 읽고 바로 위로나 조언을 하지 마. 먼저 빠진 정보를 확인할 질문 5개를 해줘. 내가 답한 뒤 확인된 사실, 내가 붙인 해석, 다른 설명, 반복된 관계 패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택으로 나눠서 정리해줘. 상대의 마음이나 진단은 확정하지 말고 정보가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말해줘.”

명령어가 길어서 좋은 것이 아니다.

AI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때문에 답변이 달라진다.

한 번 나온 분석에 반대 근거를 붙여본다

AI의 첫 답변이 마음에 들면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특히 “상대도 아직 마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은 문장은 쉽게 놓기 어렵다.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근거를 하나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말고 방금 받은 답변을 다시 검토하게 해야 한다.

“방금 해석이 틀렸을 수 있는 근거도 찾아줘.”

“내가 듣고 싶은 방향으로 답한 것은 아닌지 점검해줘.”

“연락이 올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과 낮추는 행동을 나누고, 알 수 없는 부분은 알 수 없다고 말해줘.”

그러면 조금 전까지 상대에게 마음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하던 AI가, 이번에는 이별 의사를 반복해서 밝힌 행동을 근거로 연락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차 있더니 반대편 자료도 누구보다 열심히 찾아온다.)

이것은 AI가 말을 바꿔 신뢰할 수 없다는 뜻만은 아니다.

첫 답변부터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요구한 방향에 맞춰 가능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의 답보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나란히 놓고 어떤 설명이 실제 행동과 더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다만 폭력이나 협박, 스토킹이 있었던 관계에서는 무조건 두 사람의 문제를 똑같이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 잘못도 찾아줘.”라고 요청하면 이미 많은 책임을 떠안은 사람이 자기 탓을 하나 더 만들어낼 수 있다.

그때는 이렇게 요청해야 한다.

“폭력이나 협박에 대한 책임과 나의 대응을 섞지 말고 구분해줘. 관계 개선보다 안전을 먼저 살펴줘.”

뻔한 답변은 아직 상담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다

AI에게 사연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상담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의 상담도 처음 사연을 들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한다. 질문이 되돌아오고, 내가 당연하게 믿었던 해석이 흔들리고, 서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관계의 형태가 보인다.

AI도 마찬가지다.

긴 이야기를 입력한 뒤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평균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짧은 사연이라도 무엇을 구분하고, 무엇을 질문하며, 어떤 결론은 내리지 말아야 하는지 정해주면 답변은 달라진다.

AI 상담을 잘 이용하는 사람은 남들이 모르는 대단한 명령어를 외운 사람이 아니다.

AI가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다시 묻고, 반대되는 설명을 요청하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뻔한 답을 받았다면 사연을 더 길게 쓰기 전에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AI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준 것일까.

아니면 이 이야기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일까.

By. 나만 아는 상담소

나만 아는 상담소 더 많은 칼럼 확인하기

나만 아는 상담소 블로그

나만 아는 상담소 브런치

나만 아는 상담소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나는 왜 함께 있어도 외로울까 책 표지

추천 도서

나는 왜 함께 있어도 외로울까

관계에 휘둘리는 당신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위한 책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법

황규진 소장 저 | 북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