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 되면 사람은 조금 급해진다.

연락할 사람은 없고, 그렇다고 이 마음을 그대로 안고 잠들 수도 없으니 AI를 켜게 된다. 이미 친구에게 같은 이야기를 세 번쯤 했고, 네 번째부터는 친구의 한숨이 문장보다 먼저 들리기 시작하니 말이다. (친구도 우정이 깊어서 들어주는 것이지, 전남친 행동 분석이 평생의 꿈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서 AI에게 묻는다.

“그 사람은 왜 갑자기 차가워진 걸까?”

“회피형이라서 도망간 걸까?”

“아직 나를 좋아하는데 상황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닐까?”

AI는 대답한다. 그것도 제법 그럴듯하게.

상대가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거리를 두었을 가능성이 있고, 관계에서 반복되는 갈등에 지쳤을 수도 있으며, 여전히 마음이 남아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이별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희망이 생긴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가능성이 너무 많다.

좋아해서 떠났을 수도 있고, 지쳐서 떠났을 수도 있고, 회피해서 떠났을 수도 있고, 그냥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틀릴 수가 없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AI가 상담에 쓸모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사용하면 혼자 생각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내가 놓치고 있던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시작하기 전에 AI에게 어떤 일을 맡겨도 되는지, 어떤 일은 맡기면 안 되는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사람도 모르는 전 연인의 속마음을 AI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순간부터 상담이 아니라 점괘가 되기 때문이다.

AI에게 기대해도 되는 것

AI가 가장 잘하는 일은 마음을 대신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엉켜 있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일이다.

이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건의 순서가 자주 뒤섞인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에서 갑자기 2년 전 싸움으로 넘어가고, 상대가 했던 말과 내가 그 말에서 느낀 감정이 하나로 붙어버린다.

“그 사람은 나를 무시했어요.”

이 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

상대가 실제로 했던 행동, 그 행동을 무시라고 해석한 이유,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이다.

AI는 이 셋을 나누는 데 꽤 쓸 만하다.

상대가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해석이다. 그로 인해 서운하고 버려진 것처럼 느꼈다는 것은 감정이다.

이렇게 나누고 나면 상대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조금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또 AI는 내가 쓴 긴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정리하거나, 반복되는 갈등의 형태를 찾아보거나, 상담을 받기 전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연락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바로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초안을 써보는 것, 하루 동안 감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기록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내가 반복하는 행동을 찾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큰 도움이다.

상담에서 많은 시간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리하는 데 쓰인다. AI가 그 앞부분을 도와준다면 사람과의 상담에서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AI는 답을 가진 상담사라기보다,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함께 분류해 주는 사람에 가깝다. 물론 가끔 분류하면서 남의 서류를 슬쩍 끼워 넣기도 하니 확인은 해야 한다.

상대의 마음은 맡기지 않는 것이 좋다

연애 상담에서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대부분 내 마음이 아니다.

상대의 마음이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 나를 사랑하는지, 연락이 올지, 다른 사람이 생긴 것은 아닌지 알고 싶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보는 것은 내가 입력한 이야기뿐이다.

상대의 표정도 보지 못했고, 그 사람이 친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르며, 관계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한 장면도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읽고 가능한 해석을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그 해석을 꽤 자신 있게 말한다는 데 있다.

AI는 모르는 문제라고 답안지를 비워두는 학생이 아니다. 일단 무엇이라도 써내는 모범생에 가깝다. 말투가 단정하다고 해서 내용까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 사람은 회피형인가요?”, “나르시시스트인가요?” 같은 질문은 조심해야 한다.

애착유형이나 성격에 관한 개념은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몇 개의 사건만으로 상대를 진단하기 시작하면 그 뒤의 모든 행동이 하나의 설명에 끼워 맞춰진다.

연락하지 않으면 회피해서 그런 것이고, 연락하면 통제하려는 것이고, 사과하면 다시 붙잡기 위한 조종이 된다. 어느 행동을 해도 처음 붙인 이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나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설명 안에 상대를 가두게 된다.

AI에게는 상대의 마음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하기보다 가능한 해석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편이 낫다.

“상대의 마음을 단정하지 말고, 현재 정보로 가능한 해석을 몇 가지로 나눠줘. 각각을 뒷받침하는 사실과 반대되는 사실도 함께 알려줘.”

이렇게 물으면 하나의 희망적인 설명에 매달리는 것을 조금은 막을 수 있다.

AI 상담 시작하기 전, 기대해도 되는 것과 맡기면 안 되는 것
AI 상담 시작하기 전, 기대해도 되는 것과 맡기면 안 되는 것

결정권까지 넘겨주면 안 된다

“연락할까, 말까?”

“이 사람과 헤어지는 게 맞을까?”

“재회를 기다려도 될까?”

AI에게 상담을 받다 보면 결국 이런 질문에 도착한다.

물론 물어볼 수 있다. 연락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일과 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을 비교해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까지 맡기면 안 된다.

AI는 그 선택 이후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연락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밤도 내가 견뎌야 하고, 관계를 끝낸 뒤 비어버린 일상도 내가 살아야 한다. 다시 만난 사람과 같은 갈등이 반복되었을 때 그 책임을 AI가 나눠 가지는 것도 아니다.

좋은 상담은 내 대신 선택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AI 상담도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편이 좋다.

의학적 진단이나 약물에 관한 판단 역시 AI에게 맡길 일은 아니다. 우울증인지, 공황장애인지, 약을 끊어도 되는지와 같은 문제는 반드시 전문가의 평가가 필요하다.

또 자해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들거나, 폭력과 스토킹처럼 당장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채팅창에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버텨서는 안 된다. 가까운 사람과 응급기관, 관련 전문가에게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답해도 직접 찾아와 문을 열어주지는 못한다.

시작하기 전, 이 정도는 말해두는 것이 좋다

AI에게 처음부터 긴 명령어를 외울 필요는 없다.

다만 듣기 좋은 말만 반복하지 않게 하고,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내 감정은 존중하되 내 해석에 무조건 동의하지 마. 확인된 사실과 추론을 나누고, 정보가 부족하면 먼저 질문해줘. 상대를 진단하지 말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동을 찾도록 도와줘.”

이 정도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정보를 줄수록 답변이 구체적으로 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개인정보까지 모두 적을 필요는 없다.

실명, 연락처, 주소, 회사명처럼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빼고 상대는 A, 직장 동료는 B라고 적어도 상담을 이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상담에 필요한 것은 주민등록등본이 아니라 관계의 흐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는지,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AI의 첫 답변은 판결문이 아니다

AI 상담에서 실망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무엇이든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가 틀린 답을 보고 돌아서는 사람과, 처음부터 뻔한 말만 하는 기계라 생각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이다.

둘 다 AI에게 너무 큰 자리를 주고 있다.

구원자이거나 쓸모없는 기계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사이의 도구로 사용할 자리가 사라진다.

AI는 내 감정을 정리하고, 놓친 질문을 발견하고,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속마음을 읽고, 사람을 진단하고, 내 삶의 결정을 대신하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AI를 쓰느냐보다 그 AI를 어디에 앉혀놓느냐에 가깝다.

내 옆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정리하게 할 것인지, 재판관 자리에 앉혀 내 관계의 판결을 맡길 것인지.

첫 번째라면 꽤 유용하다.

두 번째라면, 상담을 받으려다 내 삶의 운전대를 채팅창에 두고 내리는 일이 생긴다.

AI의 첫 답변은 결론이 아니다.

생각을 시작하기 위해 받아든 초안에 가깝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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