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죄책감 없이 상대를 이용할 수 있는 이유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를 이용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중성’이다. 앞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웃으며, 상대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뒤에서는 “내가 왜 저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해?”라며 냉랭하게 말한다.

이중성은 죄책감 없이 나타나기 쉬운 이유다. 대체로 사람들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이건 당연한 거야”라고 합리화해 버린다.

나르시시스트 죄책감 없이 상대를 이용하는 심리

자기중심적 세계관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필요와 욕망이 항상 우선순위에 있다고 여긴다. 모든 관계와 상황을 “내게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단순화해서 본다. 상대가 손해를 보거나 상처받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 혹은 “나는 그런 디테일에 관심 없어”라고 말하며 넘겨버린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중심을 “나”로 고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고려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겉으로는 “내가 당신을 위한다”고 떠들어도 실제로 이득을 보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 과정을 수행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원래 난 이정도 대접을 받아야 해” “저 사람들은 나한테 도움이 되는 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공감 부재

일반적으로 죄책감은 “상대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감할 때” 생겨난다. 내가 준 한 마디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됐고, 그로 인해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공감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는다. 상대가 울어도, 속이 상해도, “오버하네”라고 치부하거나 “저건 관심 받을라고 저러는 거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감이 안 되니 죄책감이 생길 틈도 없다. “왜 저렇게 감정적으로 굴어?”라고 비꼬는 태도를 보이는 순간, 이미 상대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더욱 위축된다. 결국 나르시시스트가 일으킨 갈등임에도, 피해자는 스스로를 탓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나르시시스트는 점점 죄책감을 느낄 이유를 찾지 못한다. “상대가 알아서 죄책감에 빠지니, 난 상관 없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합리화 기술

“나는 괜찮아, 옳아, 모든 문제는 네 탓이야”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순간순간 합리화를 펼쳐 나간다. 나르시시스트가 취하는 많은 언행은 논리를 갖춘 것 같아도 대부분 자기 편한 대로 재단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회사 내 프로젝트에서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훔쳐 자기 공으로 돌리고도 “내가 아니었으면 이 프로젝트가 빛을 못 봤을 거야”라고 말한다.

이런 합리화가 쌓이면, 설령 주변에서 “네 행동이 틀렸다”고 지적해도 “아니, 그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소리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이유는, 이미 머릿속에서 “나야말로 프로젝트의 중심이었다”라는 결론이 딱 잡혀 있기 때문이다.

벌을 두려워하지 않음

인간이 잘못을 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에는 “벌에 대한 두려움”도 섞여 있다. 누군가가 그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나 관계에서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영향력이나 이미지 관리 기술을 이용해, 벌을 피하거나 상황을 뒤엎을 수 있다고 믿는다. 혹은 실제로도 잘 빠져나가곤 한다. 주변인의 동조나 권력을 활용해 “나는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지어 버린다.

이런 환경이 반복되면, “내가 잘못해도 어차피 벌받지 않는다”라는 학습이 이들에게 축적된다. 누군가를 이용해도 크게 손해 볼 일이 없다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자칫 문제가 되면, 달콤한 말이나 가짜 사과로 상황을 모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나르시시스트는 아무 죄책감 없이 상대를 이용하는 쪽으로 행동패턴을 고착화한다. “내가 옳고, 내가 우선이며, 공감할 필요 없고, 처벌도 안 받을 테니 문제될 게 없어.” 이런 식의 사고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양심이 없다”라는 인상이 강해진다.


    제7감,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세계

    그러나 양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은 결코 사소한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 자체가, 뇌리에 꽂혀서 스스로를 자책하도록 만든다.

    이에 따른 스트레스와 수치심 때문에 “용서를 구해야겠다”라거나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제7감”의 위력이다. 인간이 단순히 본능대로만 움직이지 않고, 사회적·도덕적 규범을 지키며,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기반은 이 양심에서 비롯한다.

    양심이 있을수록,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아, 저 사람 정말 괴롭겠구나” 하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게 된다. 혹시나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상대를 더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고민하고, 문제가 있다면 개선책을 찾으려 애쓴다.

    이게 흔히 말하는 “공감 능력”과 결합될 때, 세상은 훨씬 살 만한 곳이 된다. 누군가가 넘어졌을 때 “왜 저렇게 멍청하게 굴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다친 데 없나?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묻는 태도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를 비롯해 무양심 경향이 강한 사람들과 달리,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꾸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려 한다. 그런데 이는 때로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짊어지고, 상대의 행동까지 내가 보살펴야 하는 줄 안다. 그렇게 혼자 감당하다 보면, 무양심자에게 이용당하거나 착취당하기 쉽다.

    즉, 무양심자 쪽에서는 “딱히 죄책감 없이” 막대하고, 양심이 있는 쪽에서는 “이게 혹시 내 잘못인가?” 하며 자신을 탓하게 된다. 관계 역학이 기울어지고, 한쪽은 상처받는 쪽이 되고 다른 쪽은 이익을 취하는 쪽이 된다.


    그래도 양심은 인간다움의 핵심

    이 글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은, “양심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라는 사실이다.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가 아무리 성공하고, 상대를 조종하며 달콤한 이득을 얻어도, 그 내면은 공허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와 진정한 정서 교감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게 더 편하지 않나?”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가장 큰 통로 중 하나가 ‘타인과의 공감 어린 교류’다. 양심은 이 교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신뢰와 유대를 쌓도록 돕는다. “이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미안해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는구나”라는 걸 경험하면, 상대를 향한 신뢰가 더 커진다.

    한편, 나르시시스트에게 이 사실은 잘 와닿지 않는다. 이들은 “상대에게 미안해하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면서 혹시라도 죄책감이 생기려 할 때, 곧바로 부정해 버린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게 왜 내 책임이지?”라는 식이다.

    시쳇말로 ‘양심의 소리’가 들릴 새도 없이 순간적으로 외부를 탓하고 본다. 물론 이들은 이 방식으로도 꽤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주변에 자신을 진심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진다.

    양심이 중요하다는 건, 그 작동 메커니즘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친구와 말다툼을 한 뒤 내가 심한 말을 뱉었다면,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서도 그 기억이 머릿속을 맴돈다.

    “너무 독설이었지 않나” “친구가 이 말에 상처받았을 텐데” 같은 후회가 고개를 든다. 이 감정이 없으면, 그냥 “야, 그건 그 친구 문제고, 난 상관없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겠지만, 양심의 작동은 “네가 책임질 부분은 있지 않냐?”고 되묻는다. 이때 내가 행동을 고치거나 사과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회복되거나 더 단단해질 수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나만 아는 상담소 프리미엄 콘텐츠 에서 더 깊이 있는 심리학적 조언을 확인하세요.

    또한, 나만 아는 상담소 네이버 블로그 에서도 다양한 주제의 심리 칼럼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