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진 골목길.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멈춘다. 방금 전 겪은 직장 동료와의 마찰을 털어놓으며 옅은 한숨을 내쉰다.
- “나는 늘 내어주기만 하는데, 사람들은 내 진심을 몰라주고 결국 다 떠나더라고. 내 성격이 너무 모자란가 봐.”
물기 어린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토록 여리고 선한 사람이 왜 세상에서 자꾸만 다치는 걸까. 거친 세상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저 어깨를 내가 감싸 안아주고 싶어진다.
추위에 떠는 저 사람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어 따뜻하게 덥혀주리라 굳게 다짐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알아보는 내 깊은 안목에 스스로 취해버린다.
지독한 감정 착취의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다.
땔감이 넉넉한 곳을 찾아내는 교활한 본능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수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운명적인 이끌림이나 깊은 영혼의 교감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아파할 줄 아는, 질 좋은 땔감을 가득 쌓아둔 다정한 사람을 귀신같이 감별해 낸다. 차갑고 메마른 사람 곁에서는 자신의 언 몸을 녹일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당신은 그들에게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이들은 번지르르한 매력이나 재력을 과시하며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표정을 짓고 당신의 얇은 동정심을 집요하게 두드린다.
- “너같이 따뜻한 사람은 처음 봐. 다른 사람들은 내 얘기 듣고 다 질려 했거든. 넌 진짜 특별해.”
얼핏 들으면 당신의 고운 심성을 칭찬하는 애틋한 고백처럼 들린다. 숨은 뜻은 서늘하다. ‘네가 내 우울과 징징거림을 군말 없이 데워줄 가장 완벽한 호구 같으니, 앞으로도 묵묵히 내 감정 쓰레기를 치우며 불을 때라’라는 일방적인 통보다.
당신은 기꺼이 그 말에 감동하며 자신의 마음 한가운데에 그를 덜컥 들여놓는다. 내가 아니면 이 불쌍한 사람을 누가 거두겠냐는 알량한 영웅심리가 당신의 눈을 철저히 가려버린다.
밑 빠진 아궁이에 쏟아붓는 일상
관계를 이어갈수록 당신의 얼굴에서 맑은 생기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일상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령하고, 밤새워 억울한 하소연을 들어준다.
그의 마음은 아무리 불을 지펴도 온기가 돌지 않는 밑 빠진 아궁이에 가깝다. 당신이 아끼고 아껴둔 맑은 감정을 땔감 삼아 밤낮으로 불을 때도 그는 늘 춥다며 투정을 부린다.
- “네가 옆에 있는데도 왜 이렇게 텅 빈 것 같지. 내가 너무 망가진 사람이라 널 힘들게만 하네.”
당신의 헌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잔인한 말이다. 얼핏 자책하는 것 같지만 속내는 정반대다. ‘네가 주는 위로와 헌신이 아직 한참 모자라니, 네 삶을 갈아 넣어서라도 내 기분을 원래대로 돌려놓아라’라는 밑도 끝도 없는 강요다.
이 억지스러운 투정 앞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건 당신뿐이다. 내 사랑이 부족해서 이 사람이 아직도 추워하는구나.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 자책하며 스스로의 일상마저 부러뜨려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끊고, 즐기던 취미 생활마저 접어둔 채 오직 그 차가운 방을 데우는 데 몰두한다. 정작 당신의 몸과 마음은 얼어붙어 바스라지고 있는데도 그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당신의 헌신이 커질수록 그는 더 춥다고 엄살을 피우며 당신의 남은 뼈대까지 땔감으로 요구한다.
동정심은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들은 아파서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척을 해야 당신이 떠나지 않고 계속 땔감을 바칠 거라는 걸 치밀하게 학습한 결과다. 혼자 일어서서 자신만의 불을 지필 생각은 애초에 없다.
누군가 평생 자신의 차가운 방에 무릎 꿇고 앉아 불을 때주길 바라는 지독한 이기심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안쓰러움에 속아 넘어간 대가는 가혹하다. 당신의 따뜻했던 마음 창고는 땔감을 다 뺏긴 채 텅 비어버렸다.
당신이 바보 같아서 당한 게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차마 모른 척하지 못하는 그 귀한 공감 능력을 엉뚱한 곳에 낭비한 탓이다.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의 삶 전체를 책임질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니다.
동정심은 사랑이 아니다. 관계를 지탱하는 핑계가 될 수도 없다. 당신의 다정함은 그 지독한 추위를 영원히 막아줄 수 있는 솜이불이 아니다.
아궁이 앞을 떠나야 할 시간
당신은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하는 성녀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삐뚤어진 성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데울 수 있다는 건 지독한 오만이다.
그 사람이 불쌍하다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어 봐야, 그는 당신의 남은 온기까지 다 빨아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땔감이 많은 다른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 떠날 거다.
더 이상 그 밑 빠진 아궁이에 당신의 소중한 젊음과 일상을 태워 넣을 필요 없다. 추워하는 그를 홀로 두고 일어서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그는 애초에 얼어 죽을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떠나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표정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동정심을 자극해 기어코 따뜻한 방을 얻어낼 생존력을 갖췄다.
그 퀴퀴하고 차가운 방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면 된다. 재투성이가 된 낡은 옷을 털어버리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게 낫다.
당신의 남은 온기는 당신 스스로의 얼어붙은 몸을 덥히는 데 쓰는 것으로 충분하다. 혹시 지금, 당신의 일상마저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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