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인적이 드문 한강 공원의 벤치. 캔맥주를 홀짝이던 그가 밤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연다. 평소 회사나 친구들 앞에서는 좀처럼 속내를 비치지 않고 무뚝뚝하던 사람이다.

  • “나 원래 남들한테 이런 얘기 절대 안 하거든. 속마음 꺼내봐야 약점만 잡히니까. 근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다 털어놓게 되네. 나한테 진짜 기대 쉴 곳은 너밖에 없어.”

이 고백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찌릿한 쾌감이 번진다. 굳게 닫혀 있던 무거운 철문이 오직 나를 향해서만 활짝 열린 기분이다. 콧대 높고 까다로운 사람이 내 앞에서만 무장해제된다는 사실은 강렬한 도취감을 선사한다.

남들은 모르는 그의 여린 진짜 모습을 나만 안다는 짜릿함. 세상 수많은 사람 중 내가 가장 특별한 존재로 선택받았다는 은밀한 우월감에 흠뻑 취해버린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기꺼이 되어주리라 다짐한다. 스스로 그 좁은 철문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거다.

특별석이라는 달콤한 독배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타인과 벽을 치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고상한 신비주의로 포장한다. 남들과 섞이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닫힌 성향을, 마치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매력인 양 전시한다. 그러다 당신이라는 타깃이 정해지면 그 견고해 보이던 벽의 틈새를 살짝 벌려 당신만 쏙 집어넣는다.

  • “다른 사람들은 다 가식적이고 얕아서 피곤해. 진짜 내 밑바닥을 아는 건 너뿐이야.”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를 띄워주는 완벽한 찬사처럼 들린다. 속내는 정반대다. ‘나는 저 밖에 있는 시시한 인간들과 격이 다른 비범한 존재고, 네가 감히 내 내면세계에 들어올 VIP 자격을 얻었으니 이제부터 나를 숭배하라’는 교만한 선언이다.

당신은 이 달콤한 독배를 단숨에 들이킨다. 그의 까칠함마저 매력으로 승화시킨다. 친구들이 그의 무례하거나 차가운 태도를 지적하면 오히려 당신이 나서서 그를 변호한다.

속으로 ‘너희는 이 사람의 진짜 다정한 모습을 몰라서 그래’라며 주변 사람들을 얕잡아본다. 남들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진가를 나만 홀로 알아보고 품어준다는 영웅 심리에 빠져든다.

그의 단점마저 내가 가진 사랑의 위대함과 수용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독점권이 족쇄로 변하는 밀실

나만 아는 특별한 방에 들어왔다는 우월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나에게만 마음을 연다는 건, 역으로 말하면 그가 쏟아내는 모든 눅눅하고 썩은 감정을 나 혼자 독박을 쓰고 받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초반의 달콤했던 속마음 고백은 점점 무거운 불평불만으로 변질된다. 회사 상사 욕부터 시작해 세상에 대한 원망, 과거의 상처, 피해의식까지 끝도 없이 쏟아진다.

세상천지에 마음 터놓을 곳이 당신밖에 없으니, 당신은 그의 24시간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전담하게 된다.

  •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마저 내 편을 안 들어주면 난 어떡해? 넌 나랑 결이 같아서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당신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거나 객관적인 조언을 건넬 때 그가 내뱉는 원망이다. 몹시 배신감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특별석을 내어줬는데, 네가 감히 내 입맛에 맞게 맞장구를 치지 않다니 당장 사과하고 원래의 헌신적인 태도로 돌아가라’는 협박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덜컥 겁이 난다. 그 특별한 구원자 자리에서 박탈당할까 봐 두려워진다. 내가 여기서 손을 놓으면 이 사람은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질 것 같다는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결국 당신은 자신의 피로감을 억누르고 다시 그를 달래는 쪽을 택한다. 나에게만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준 가엾은 사람을 매몰차게 버리는 나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창문 없는 지하실에서의 질식

관계가 깊어질수록 당신의 일상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그의 유일한 이해자 노릇을 하느라 당신의 인간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혼자 우울하게 있을 그 사람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와 서둘러 자리를 파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던 건강하고 가벼운 대화들은 사라지고, 오직 그의 무겁고 끈적한 내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당신은 남들과 다르게 이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었다. 막상 겪어본 그 심연은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창문 없는 지하실에 가깝다. 그 방에 갇혀 그의 끝없는 결핍과 징징거림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보면 숨이 턱턱 막혀온다.

그는 마음을 연 게 아니다. 자신의 비대한 자아와 끝없는 불만을 안전하게 쏟아부을 만만한 호구를 하나 골라 방 안에 가두어 둔 것뿐이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숨을 쉬기 위해 문밖으로 나가려 하면 세상 가장 처연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남들이 못 들어오게 막아둔 특별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자물쇠를 채워둔 음침한 감옥이었다.

특별하다는 허영심을 내려놓을 때

나에게만 마음을 연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당신은 특별한 구원자가 아니다. 그 사람의 폐쇄적인 성향은 당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고칠 수 있는 낭만적인 상처가 아니다.

그저 타인과 건강하게 교류할 줄 모르는 미성숙함이자, 편하게 기대어 에너지를 뽑아 먹을 숙주를 고르는 치밀한 생존 방식일 뿐이다.

당신이 가진 다정함과 공감 능력, 그리고 타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그 순수한 열망을 그들은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당신의 그 알량한 우월감을 부추겨 스스로 목에 족쇄를 차게 만들었다.

이 무거운 영웅 놀이는 여기서 끝내는 게 낫다. 당신이 떠나면 그가 무너질 거라는 걱정은 지독한 오만이다. 그 지하실 문을 닫고 당신이 떠나는 순간, 그는 귀신같이 밖으로 기어 나와 또 다른 다정한 사람을 찾아내 똑같은 말을 속삭일 거다. 나한테 진짜 기대 쉴 곳은 세상에 너밖에 없다고.

선택받았다는 환상을 버려라.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그 지하실에 더 이상 당신의 맑은 산소를 불어넣으며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그 어둠 속에서 혼자 썩어가든 말든 내버려 두고, 조용히 문을 박차고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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