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갑작스레 눈이 떠진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명치끝에서부터 식도까지 뜨겁고 쓴 액체가 역류하는 기분이다. 그 액체의 정체는 명백한 살의다.
그가 불행해졌으면 좋겠다. 그가 나에게 했던 짓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처참하게 짓밟혀서 길바닥에 나앉기를 바란다. 그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당신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곧이어 찾아오는 것은 차가운 자기혐오다. 내가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었나. 나는 왜 아직도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저주를 퍼붓고 있을까. 용서해야 내가 편해진다던데, 나는 영영 구제받지 못할 속 좁은 인간인 걸까.
당신은 당신의 분노를 부끄러워한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흉측한 괴물을 지하실에 숨겨둔 사람처럼, 당신은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고, 다독이고, 황급히 뚜껑을 덮는다. 세상은 당신에게 ‘성숙한 이별’을 요구하고, 당신은 그 기대에 부응하려 애쓴다. 쿨하게 잊는 것, 웃으며 넘기는 것, 그것이 승리자의 태도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의 그 도덕적인 믿음을 부수려 한다. 당신이 느끼는 그 살기 어린 분노, 그 지독한 증오심. 그것은 당신이 타락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영혼이 아직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생물학적인 신호다.
당신은 화를 내야 한다. 더 뜨겁게, 더 집요하게, 더 맹렬하게 분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노만이 당신을 그 지옥에서 영원히 탈출시킬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마취가 풀린 자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는 일종의 전신 마취 수술과 같았다. 그는 당신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도려내는 동안, ‘사랑’이라는 강력한 마취제를 투여했다. 그는 당신에게 “너는 예민해”, “네가 문제야”라고 속삭이며 당신의 감각 신경을 차단했다. 당신은 피를 흘리면서도 아픈 줄 몰랐고,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도 웃어야 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분노는, 그 마취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이제야 비로소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 팔이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내 존엄이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이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당신의 뇌가 뒤늦게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술실에서 깨어난 환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점잖지 못하다”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가 보내는 정직한 비명이다. 당신의 분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당신의 자아가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훼손된 존엄이 지르는 비명이다.
만약 당신이 그를 겪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당신의 자아가 완전히 괴사(壞死)하여,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시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화가 난다는 것은, 당신 안에 아직 ‘지켜야 할 나’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면역 체계로서의 분노

생물학적으로 보자. 우리 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백혈구는 맹렬하게 싸움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고열이 나고, 오한이 들고, 온몸이 쑤신다. 우리는 그 열을 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열은 우리 몸이 바이러스를 태워 죽이기 위해 스스로 피워 올린 ‘치유의 불’이다. 열이 나지 않는 몸은 바이러스에 정복당해 조용히 죽어갈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당신의 영혼에 침투한 악성 바이러스다. 그는 당신의 경계를 허물고, 자원을 약탈하고, 정신을 오염시켰다. 당신이 느끼는 분노는, 당신의 심리적 면역 체계가 이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키는 ‘고열’이다.
“당장 나가! 너는 내 인생에 들어올 자격이 없어!” 당신의 무의식이 이렇게 외치며 그를 밀어내는 힘, 그것이 바로 분노다.
이 열기를 억지로 식히지 마라. 이성이라는 이름의 해열제를 먹지 마라. “그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야”라며 섣불리 열을 내리지 마라. 그 열기가 충분히 타올라야 바이러스가 죽는다. 어설프게 열을 내리면 바이러스는 내성을 갖고 당신의 몸 깊숙한 곳에 숨어든다. 그것은 훗날 ‘화병’이나 ‘우울증’, 혹은 ‘만성 무기력’이라는 더 치명적인 질병으로 변이 되어 당신을 안에서부터 갉아먹을 것이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분노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사회는, 특히 여성에게 분노를 거세하려 한다. 화내는 여자는 히스테릭하고, 드세고, 매력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산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사회적 세뇌를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그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면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며 당신을 검열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그를 용서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일지 모른다. 당신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이제 그 낡은 도덕책을 덮을 시간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악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의 권리다. 당신은 성녀가 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밀 것이 아니라, 맞은 뺨을 감싸 쥐고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야 한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갈지 모르지만, 분노할 줄 아는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어디든 간다. 분노는 에너지다. 그것은 정체된 늪에 빠진 당신을 건져 올려 마른땅으로 밀어내는 폭발적인 추진력이다. 그 에너지를 부정하지 말고, 핸들을 잡아라. 그 힘을 이용해 그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나라.
분노를 땔감으로, 당신의 집을 데워라

물론 분노에는 위험이 따른다. 그 불길이 밖으로 향하면 복수가 되고, 안으로 향하면 자해나 우울이 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복수하겠다고 칼을 가는 것은 여전히 그에게 당신의 에너지를 갖다 바치는 꼴이다. 그를 죽이겠다고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 뜨거운 불을 ‘난로’ 안에 가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를 향해 돌을 던지는 대신, 그 분노의 열기로 당신의 차가워진 방을 데워라.
“내가 다시는 저런 인간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으리라.” 이 단호한 결심은 분노에서 나온다. 당신의 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고, 쇠로 된 대문을 달고, “접근 금지”라는 팻말을 붙이는 힘. 그 망치질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분노다.
그가 밉고 원망스러울 때마다, 그 에너지를 당신 자신에게 쏟아라.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만들고,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고, 돈을 벌어 통장을 채워라. “네가 나를 망가뜨리려 했지만, 나는 보란 듯이 더 단단해졌다.” 이것이야말로 분노를 가장 우아하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연금술이다.
미움이 사랑보다 질기다
시간이 흐르면 분노도 사그라든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당신의 장작은 젖어 있고, 불은 자꾸 꺼지려 한다. 당신은 자꾸만 약해지고, 미화된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당신의 발목을 잡는다.
그때 필요한 것이 분노라는 기름이다. 그가 당신에게 했던 모욕적인 말들, 그가 당신을 기만했던 순간들, 당신이 흘렸던 그 억울한 눈물들을 기억해라. 잊지 마라. 그 기억들이 희미해지려 할 때마다 기름을 부어라.
미움은 사랑보다 질기다. 사랑은 우리를 눈물짓게 하지만, 미움은 우리를 악착같이 살게 만든다. 그가 당신을 파괴하려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당신은 다시는 그 덫에 걸리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첫 번째 증거다. 그러니 마음껏 화내라. 그 불길이 당신의 과거를 다 태우고, 오직 당신이라는 순금만을 남길 때까지.
By. 나만 아는 상담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