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조차 살아갈 동력이 되는, 그 뜨겁고 지루한 시간에 대하여

세상은 ‘용서’라는 단어를 너무나 좋아한다. 서점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한 심리학 책이나 에세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미움은 너를 갉아먹는 독이라고, 용서해야 비로소 네가 자유로워진다고, 진정한 어른은 과거를 흘려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그 말들은 참으로 우아하고, 도덕적이며, 반박하기 힘들 만큼 그럴듯하다.

나르시시스트와의 전쟁 같은 관계를 끝내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당신에게, 주변 사람들은 마치 세련된 조언이라도 건네듯 툭 던진다. “이제 그만 잊어. 그 사람도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미워하는 마음 품고 있어봤자 너만 손해잖아.”

나는 오늘, 그 점잖고 이성적인 위로가 당신에게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당신은 지금 사고를 당해 뼈가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리며 도로 위에 누워 있다. 가해자는 사과는커녕 당신을 비웃고 사라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에게 피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저 멀리 사라지는 가해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이것은 치유가 아니다. 이것은 기만이다. 아직 소화되지 않은 분노를 억지로 삼키는 것, 가슴 한복판에 시퍼런 멍이 들었는데도 쿨한 척 웃어 넘기는 것. 그것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고결한 행위가 아니라, 곪아 터져 진물이 흐르는 환부 위에 얇은 비단 한 장을 덮어두고 “이제 다 나았다”라고 최면을 거는 짓과 같다. 겉보기엔 매끄러워 보일지 몰라도, 그 비단 아래에서는 살이 썩어들어가고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 우리말로는 이것을 ‘화병(火病)’이라 부른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스러운 용서가 아니다. 당신은 충분히 혐오해야 하고, 마음껏 분노해야 하며, 그 뜨거운 불길로 당신 내면에 침투한 독성을 태워 없애야 한다. 용서는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아주 먼 훗날에야 찾아오는 이야기다.


분노는 당신을 지키는, 가장 뜨거운 열(熱)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분노를 통제해야 할 감정, 미성숙한 감정으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라는, 인간의 탈을 쓴 포식자를 경험한 이후 당신의 분노는 그 정의가 달라져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 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몸은 펄펄 끓는 열을 낸다. 고열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우리 몸이 병균과 싸우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열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면역 체계가 붕괴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지독한 분노, 잠들지 못하게 하는 억울함, 그를 향한 살의에 가까운 미움. 이것은 당신의 영혼이 괴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작동시킨 ‘심리적 고열’이다.

그는 당신의 자존감을 조작했고, 당신의 현실 감각을 비틀었으며, 당신이라는 존재의 존엄을 훼손했다. 그 명백한 침해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의 존엄을 지킬 의지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내가 당한 시간들이 너무 억울해.” 이런 마음이 들끓는가? 다행이다. 당신의 ‘방어 기제’가, 당신의 생명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이 불길을 억지로 끄려 하지 마라. 이성이라는 차가운 물을 끼얹어 끄려 하면, 그 불은 꺼지는 게 아니라 당신의 내장 기관으로 파고들어 깊은 궤양을 만든다.

차라리 그 불이 활활 타오르게 두어라. 그 뜨거운 에너지를 연료 삼아, 침대에서 일어나고, 밥을 챙겨 먹고, 그가 부수고 간 당신의 울타리를 다시 용접해라. 지금 당신을 살게 하는 힘은, 고상한 용서가 아니라 그 펄펄 끓는 분노다.


용서는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용서를 의지의 영역으로 착각한다. “그래, 오늘부터 그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어.” 이렇게 마음먹으면 되는 줄 안다. 마치 다이어트 결심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용서는 결심이나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계절이 바뀌듯,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떨어지듯, 시간이 흐르고 조건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

뼈가 부러졌는데 “오늘부터 뼈를 붙이기로 결심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뼈가 붙는가? 아니다. 깁스를 하고, 영양을 섭취하고, 절대적인 시간이 흘러야 뼈는 붙는다. 마음도 똑같다.

당신이 그를 충분히 미워하고, 그가 저지른 짓의 그 잔인한 기제(機制)를 낱낱이 파악해 깨닫고, 더 이상 그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만큼 당신의 자아가 단단해졌을 때. 당신이 너무나 잘 살고 있어서 과거의 기억 따위는 귀찮은 먼지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날카롭던 미움이 무뎌지고, 그 자리에 서늘한 무관심이 들어선다.

그때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아, 내가 그를 용서했구나”가 아니라, “아, 이제 그 인간이 내 안에서 완전히 죽었구나”라는 것을.

그를 용서하려고 애쓰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를 당신 마음의 가장 좋은 자리에 계속 모셔두는 일이다. 그를 붙들고 씨름하지 마라.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은 당신을 여전히 피해자의 자리에 묶어둔다. 그저 당신의 상처를 소독하는 일에만 집중하라. 딱지는 억지로 떼어내면 피가 나고 흉이 진다. 새살이 차오르면 딱지는 샤워하다가도 모르는 새 툭, 하고 떨어진다. 용서도 꼭 그와 같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것은 오독(誤讀)의 시작이다

나르시시스트와 헤어진 후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그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다. “그 사람도 어릴 때 부모에게 상처받아서 그랬을 거야.” “그 사람도 사실은 외로웠던 게 아닐까?”

당신의 그 뛰어난 공감 능력은, 이제 당신을 공격하는 칼날이 된다. 당신은 그의 불우한 서사를 상상하며, 그의 악행에 면죄부를 주려 한다. 그를 ‘괴물’이 아닌 ‘상처받은 영혼’으로 재정의함으로써, 당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멈춰야 한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당신을 학대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타인을 착취하지는 않는다.

그의 행동 이면에 도사린 심리를 차갑게 꿰뚫어 보는 것은 필요하다. “아, 그는 자존감이 없어서 나를 깎아내림으로써 우월감을 느꼈구나.” 하지만 거기에 감정을 섞어 “그러니 내가 품어줘야지”라고 나가는 순간, 당신은 다시 그 지옥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의 이해심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그는 당신의 이해를 ‘호구 잡히기 좋은 약점’으로 여길 뿐이다. 썩은 사과는 아무리 닦아도 썩은 사과다. 그것을 ‘발효된 사과’라고 아름답게 포장해서 먹으려 들지 마라. 배탈이 나는 건 당신뿐이다.


진정한 복수는 당신의 행복이 아니다, 당신의 ‘무심함’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최고의 복수는 네가 잘 사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잘 사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면, 그것 역시 여전히 그에게 얽매여 있다는 증거다. 그가 볼 수 있는 곳에 행복한 사진을 올리고, 그가 들으라고 보란 듯이 성공하려 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여전히 그의 관객석을 의식한 연극일 뿐이다.

가장 처절하고 완벽한 복수는, 당신이 그를 위해 단 1초의 시간도, 단 1칼로리의 에너지도 쓰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를 욕하고 다니는 것조차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먹잇감’이 된다. “거봐, 걔 아직 나 못 잊어서 저러는 거야. 내가 치명적이긴 했지.” 그는 당신의 비난마저 땔감으로 삼아 자신의 텅 빈 자아를 데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벌은 비난이나 복수가 아니다. 바로 철저한 ‘투명 인간 취급’이다. 길을 걷다 발에 채이는 작은 돌멩이에게 화를 내거나 복수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냥 “아, 돌이 있네” 하고 무심하게 피해 갈 뿐이다. 당신이 도달해야 할 경지는 바로 그것이다.

그가 잘 살든 못 살든, 새 여자를 만나든 말든, 그것이 당신의 오늘 저녁 밥상 메뉴를 고르는 일보다 하등 중요하지 않게 되는 상태. 그의 소식이 들려와도 마치 스팸 문자를 지우듯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

당신의 우주에서 그를 완전히 추방하여, 그가 먼지처럼 부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잔인한, 그리고 완성된 복수다.


스스로에게 베푸는 자비

그러니 부디, 아직 그를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탓하지 마라. “나는 왜 이렇게 뒤끝이 길까.” “나는 왜 아직도 과거의 감옥에 갇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당신의 가슴을 치지 마라. 그것은 가해자가 떠난 자리에 남아서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하는 2차 가해다.

당신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당신은 피와 살이 있고, 감정이 흐르는 인간이다. 찔리면 피를 흘리고, 모욕당하면 화를 내고, 소중한 것을 빼앗기면 슬퍼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당신 마음 한구석 웅크리고 있는 그 상처받은 아이에게, “괜찮아, 미워해도 돼. 욕해도 돼. 저주해도 돼. 그럴 만했어.”라고 말하며 등을 쓸어주어라.

남을 용서하려고 애쓰는 에너지의 반의반만이라도, 당신 자신을 보듬는 데 써라.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햇볕 좋은 벤치에 앉아 있어라.

당신이 당신을 귀하게 대접할 때, 비로소 그 지긋지긋한 악연의 끈이 삭아 끊어지기 시작한다. 용서는 그를 위한 선물이 아니다.

용서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당신이 너무나 행복하고 단단해져서 과거의 불행 따위는 기억조차 희미해질 때, 덤처럼 주어지는 당신 스스로를 위한 평화일 뿐이다.

지금은 그냥 미워하라. 그 미움이 다 타버려 하얀 재가 될 때까지.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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