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내 탓이라는 세뇌가 시작되는 지점

금요일 저녁,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앞. 30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그가 느긋하게 걸어온다.

  • “오늘 7시 약속이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림에 지쳐 묻는 말에 그는 미안한 기색 없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 “네가 7시 반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맞춰 온 건데 왜 짜증을 내?”

어제 통화로 7시라고 두 번이나 짚어줬다. 하지만 너무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다. 방금 전까지 확신했던 내 기억이 흔들리는 이 짧은 순간,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조용한 세뇌가 시작된다.

기억을 덮어쓰고 책임을 넘기는 사람

며칠 뒤, 그의 차 안. 조수석에 둔 서류 봉투가 구겨져 있다.

  • “이거 중요한 서류라고 구겨지지 않게 치워달라고 했잖아.”

그는 핸들을 쥔 채 무심하게 대꾸한다.

  • “네가 언제? 나한테 똑바로 말 안 해놓고 또 내 탓하네.”

분명히 말했던 장면이 생생한데,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기억을 허구로 만든다.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실수나 흠집을 가리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상대를 ‘기억력이 나쁘거나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억울한 마음에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나 통화 기록을 찾아 증거를 들이밀어 보지만, 돌아오는 건 “사람 피곤하게 그런 걸 다 뒤져보냐”는 비아냥뿐이다. 잘못을 짚어내려던 시도는 무례한 추궁으로 변질되고 만다.

눈치를 보며 대본을 고치는 일상

이런 실랑이가 반복되면 일상에는 짙은 안개가 낀다. 그에게 서운한 점이 생겨도 바로 입을 떼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만 멍하니 내려다본다.

  •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한 게 맞나?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거면 어떡하지?’

문자 메시지 창에 글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혼자 수십 번 대본을 검열한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 자신을 먼저 의심하며 주눅이 드는 거다.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는 대신, 내 행동에 빈틈이 없었는지 복기하느라 진을 뺀다.

내 탓을 찾아내야만 이 숨 막히는 긴장이 끝날 것 같아, 결국 “내가 오해하게 말했나 봐, 미안해”라며 스스로 백기를 든다.

남의 티끌과 자신의 들보

내가 백기를 들면 그는 관대한 얼굴로 상황을 종료한다. 하지만 입장이 바뀔 때는 잣대가 무섭게 달라진다.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내가 사 오기로 했던 우유를 깜빡했다.

  • “너는 항상 덜렁대고 책임감이 없더라. 내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지?”

자신의 잘못은 ‘네가 똑바로 말 안 한 탓’으로 넘기던 그가, 나의 작은 실수는 인격적인 결함으로 묶어버린다. 내가 기억을 못 하면 무책임한 것이고, 자기가 기억을 못 하면 내가 말을 똑바로 안 한 탓이 된다.

이 불공평한 대화 속에서 자존감은 서서히 깎여나가고, 모든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나라는 무거운 죄책감만 덩그러니 남는다.

내 탓이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오기

다시 찾아온 주말. 그가 또 약속 장소를 엉뚱한 곳으로 착각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 “네가 어제 역 앞으로 오라며. 왜 말을 맨날 바꿔?”

여느 때처럼 내게 화살을 돌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가방을 챙겨 메고 짧게 대답한다.

  • “나는 분명히 백화점이라고 말했어. 네가 착각한 거니까 더 이상 내 탓 하지 마.”

황당해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기억을 조작하고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 내 온전한 정신을 증명하려 애쓸 필요 없다. 억지로 내 탓을 찾아내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은 멈추는 게 맞다.

그의 억지스러운 책임 전가에 동요하지 않고 내 기억과 판단을 믿고 단호하게 뒤돌아서는 순간, 끈질기게 옭아매던 가스라이팅도 힘을 잃는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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