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에도 당신의 곁을 맴돌고 싶어 하는 그 기이한 욕망에 대하여

이별의 순간, 혹은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뜬금없는 제안을 던진다. “우리, 나쁘게 헤어질 필요 없잖아.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당신은 혼란에 빠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의 밑바닥을 보며 싸웠거나,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아 가슴이 난도질당한 상태다. 그런데 친구라니. 이 말은 묘하게 달콤하게 들린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겪은 그 진흙탕 같은 싸움들이 사실은 별일 아니었다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아끼는 지성적인 성인 남녀라고 위로하는 듯하다.

당신은 생각한다. 그래, 사랑은 끝났어도 인간적인 정은 남아있으니까.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건 너무 아프니까,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옆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어쩌면 친구로 지내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품는다.

하지만 정신 차려야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내미는 ‘친구’라는 카드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맺자는 휴전 협정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자신의 영토 안에 영원히 가둬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겠다는 ‘노예계약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는 당신을 사랑해서 친구로 남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신을 ‘소유’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제공하는 ‘자원’을 잃기 싫어서 친구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갖다 붙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기만적이고 잔인한 제안이다.


당신은 그에게 가장 가성비 좋은 보험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타인은 인격체가 아니라 자원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자신을 숭배해 주고, 에너지를 공급해 줄 ‘숙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새로운 숙주를 구하는 일은 꽤 번거롭고 피곤한 작업이다. 낯선 사람에게 매력을 어필하고, 공을 들이고, 넘어오게 만드는 ‘작업’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이미 길들여져 있다. 그의 식성을 알고, 그의 기분 변화를 맞출 줄 알며, 그가 힘들다고 징징거릴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숙련된 조력자’다.

그가 당신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는 것은, 회사로 치면 당신을 해고해 놓고 “월급은 줄 수 없지만, 사무실에 나와서 일은 계속해 줘. 가끔 밥은 사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연인의 의무(헌신, 감정 노동, 잠자리 등)는 계속 제공받되, 연인의 권리(존중, 책임, 미래 약속)는 주지 않겠다는 심보다.

그에게 있어 ‘전 애인과의 우정’은 가성비가 끝내주는 보험 상품이다. 새로운 연인과 잘 안 풀릴 때, 혹은 심심할 때, 갑자기 성적인 욕구가 생길 때, 당신은 언제든 연락하면 받아주는 ‘5분 대기조’가 되어준다. 그는 당신이라는 보험을 해지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보장은 계속되는데, 미쳤다고 해지하겠는가.


그의 이미지를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

나르시시스트가 이별 후에도 친구 관계를 고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평판 관리’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의 시선에 목숨을 건다. 만약 당신과 나쁘게 헤어져서 당신이 그를 욕하고 다닌다면, 그의 완벽한 이미지에 흠집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헤어졌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야”라는 문장은 그를 얼마나 쿨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가. “내가 좀 부족해서 헤어졌지만, 걔도 나를 이해해 줬어.”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 주기로 했어.”

이런 멘트는 그를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된다. 심지어 그는 당신을 자신의 ‘하렘(Harem)’에 전시해 둠으로써, 새로운 연인에게 자신의 인기를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전 여자친구들도 다 나랑 친구로 지내. 내가 그만큼 괜찮은 남자라는 증거 아니겠어?”

당신은 그가 쓴 ‘성숙한 이별’이라는 연극의 조연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속은 문드러지는데, 그는 당신을 옆에 세워두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이 기만적인 쇼에 동참하는 것을 당장 멈춰야 한다.


희망 고문, 당신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형벌

당신이 그의 친구 제안을 받아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미련’일 것이다. 친구로라도 곁에 있으면 언젠가 그가 내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지옥이 펼쳐진다. 친구라는 명분 아래, 그는 당신에게 자신의 새로운 연애사를 시시콜콜 늘어놓을 것이다.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얘가 좀 피곤하게 구네. 너는 안 그랬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묘한 우월감과 함께 질투심에 휩싸인다. ‘그래, 나만 한 여자가 없지’라고 생각하며 그를 위로해 준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파놓은 ‘삼각관계(Triangulation)’의 덫이다. 그는 당신과 새로운 여자를 비교하며 양쪽 모두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부풀린다.

당신은 그가 새로운 여자와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잠을 자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한다. 친구니까. 쿨해야 하니까. 당신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잘됐네”라고 말하며 웃어 보여야 한다. 이것은 고문이다. 당신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당신의 영혼을 바짝 말려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는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한, 그는 안심하고 밖으로 나돌 것이다.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이 여행을 즐기는 법이다. 당신이 그 집을 부수어버려야, 그가 비로소 노숙자가 되어 추위를 느낄 것이다.


친구라는 단어를 모독하지 마라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친구란 무엇인가. 서로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며, 대가 없이 신뢰를 주고받는 관계다.

그가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가? 아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을 떠나 행복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대가 없는 신뢰를 주는가? 아니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려 이득이 될 때만 연락한다.

그는 친구가 아니다. 그는 당신의 인생에 침투한 스파이고,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 가는 도둑이며, 당신의 감정을 착취하는 기생충이다. 그런 존재에게 ‘친구’라는 고귀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언어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 이렇게 대답해 주어라. “아니, 나는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어. 내 친구들은 나를 아끼고 존중해. 너는 자격 미달이야.”


박물관은 문을 닫아야 한다

지난 사랑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때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며 깨끗하게 돌아섰을 때의 이야기다. 학대와 기만으로 얼룩진 관계에는 추억이 머물 자리가 없다. 그곳은 추억의 박물관이 아니라, 끔찍한 고문 도구들이 전시된 범죄 현장일 뿐이다.

친구로 지내자는 것은, 그 범죄 현장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라는 말과 같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웃으며 지내자는 것이다. 당신이 제정신이라면, 그곳을 당장 봉쇄하고 불태워 버려야 한다.

단호하게 거절하라. “아니, 난 너랑 친구 할 생각 없어. 다시는 연락하지 마.”

그가 비난할 것이다. “너 정말 속 좁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냐”라며 당신의 죄책감을 자극할 것이다. 흔들리지 마라. 그 비난은 그가 당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내지르는 패배자의 비명일 뿐이다.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끊는 것이다. 썩은 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나무 전체가 죽는다. 그를 당신의 인생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것, 어떤 호칭으로도 그가 당신 곁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우정이자 의리다.

당신의 진짜 친구들은 당신이 그와 헤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짜 친구를 당신의 현관 밖으로 영원히 추방하라.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