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에게 결혼
오래된 연인들이 있다. 8년, 혹은 10년. 이제는 서로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상대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 것만 같은, 공기처럼 익숙해진 관계.
남들이 보기에는 당장 내일이라도 청첩장을 내밀 것 같은, 안정이라는 이름의 궤도에 완벽하게 안착한 관계다. 기념일은 꼬박꼬박 챙기고, 서로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여자의 휴대폰 사진첩에는 그와 함께한 수천 장의 사진이 계절별로 저장되어 있고, 그녀의 미래 계획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다.
여자에게 이 관계는 결혼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녀는 이 길의 끝에 두 사람이 함께 여는 문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남자에게 이 관계는, 어쩌면 결혼이라는 종착역을 피하기 위한 완벽한 정거장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정거장의 안락함을 사랑한다. 하지만 다음 역으로 떠날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여자가 용기를 내어 말한다. “우리 이제… 결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균열을 본다. 그는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대신 너무나 익숙해서 이제는 지겨워지기까지 한 레퍼토리를 꺼내놓는다.
- “지금도 너무 좋은데, 굳이 뭘 바꿔야 해?”
- “결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냥 서류일 뿐인데.”
그는 이 주제가 얼마나 무겁고 피곤한지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교묘하게 화살을 비껴간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분위기를 망친 사람이 된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든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당신을 깊은 혼란의 늪에 빠뜨린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왜 이토록 오랜 시간 곁을 지키는 걸까. 그의 다정함, 함께 쌓아온 추억들은 모두 거짓이었을까.
문제는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단어가 그의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공포다.
회피형 남자에게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자유의 종언이자 책임이라는 이름의 감옥의 시작이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영원한 연애, 도착하지 않는 약속

회피형 남자는 장기 연애의 명수다. 그는 연애가 주는 안정감, 친밀감, 정서적 지지를 누구보다 잘 누린다.
그는 당신과 함께 영화를 보고, 주말에 맛집을 찾아다니고,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긴다.
당신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며 어깨를 빌려주고, 당신의 성취에 누구보다 기뻐해 주기도 한다. 그는 완벽한 남자친구의 역할을 흠잡을 데 없이 수행한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연애’라는 안전하고 구속력 없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에게 장기 연애는 결혼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장 이상적인 목적지다.
그는 결혼이라는 법적, 사회적 계약 없이도 연인 관계의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현재 상태에 지극히 만족한다. 그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평생’의 형태는 ‘연인’이어야만 한다.
마치 아주 마음에 드는 월세집에 사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집의 위치, 구조, 채광에 만족하며 내부를 아끼고 예쁘게 꾸민다. 하지만 집을 완전히 소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집주인이 매년 재계약을 요구할 때마다 그는 기꺼이 응하지만, 어느 날 집주인이 이 집을 아예 사지 않겠냐고 묻는 순간 그는 돌변한다. 갑자기 집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벽에 금이 간 것 같아.’
- ‘수압이 약한 편이지.’
- ‘역에서 조금 멀잖아.’
그는 집을 사지 않을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아내고, 결국 이사를 고민한다.
‘결혼’이라는 계약서는 그에게 수많은 의무 조항으로 가득 찬 매매 계약서처럼 읽힌다.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과업의 목록이 된다.
그는 이 과업들이 자신의 삶을 잠식하고, 평생 지켜온 고유의 독립성(independence)을 해칠 것이라 믿는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현상 유지를 택한다.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영원히 연애라는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 당신이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 주변의 시선, 흘러가는 시간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에게는 이 안락한 월세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다. 그는 당신의 미래를 담보로 자신의 현재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책임이라는 이름의 감옥

그가 결혼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책임 회피(responsibility avoidance) 성향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결혼은 낭만적인 서사가 아니라, 자신의 통제권을 빼앗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책임의 목록이다.
그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아마 이런 것들일 것이다.
- 경제적 통제권 상실
- 이제 내 월급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 사고 싶은 것을 살 때마다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 내 이름으로 된 대출금이 더 늘어날 것이다.
- 시간적 통제권 상실
- 명절마다 원치 않는 친척들을 만나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한다.
- 주말 아침에 늦잠을 자는 대신 아이와 놀아줘야 할지도 모른다.
- 퇴근 후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이제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된다.
- 감정적 통제권 상실
- 아내의 기분을 항상 살펴야 한다.
-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녀의 가족 문제에 감정적으로 얽히게 된다.
- 나의 감정보다 ‘우리’의 감정이 우선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드는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채워지는 수많은 족쇄다. 그는 이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시간, 돈, 감정적 에너지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통제하고 억제하며 살아왔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그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런 그에게 결혼은 자신의 생존 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위협적인 사건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기대와 요구로부터 벗어날 소극적인 자유, 즉 ‘방해받지 않을 권리’에 가깝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자신의 삶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회피형 결혼관의 핵심이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과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당신의 남편이 되는 대신, 영원히 당신의 남자친구로 남고 싶어 한다.
당신의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가

그의 결혼에 대한 두려움은 당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책임과 구속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악의가 아니라, 상처 입은 내면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당신의 고통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당신이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면 그가 변할까? 그는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기다리고 인내할수록, 그는 이 책임 없는 관계의 안락함에 더욱 익숙해질 뿐이다. 당신의 배려는 그에게 변화의 동기가 아니라, 현상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결국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를 결혼하게 만들까?’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그의 자유와 미성숙을 위해 나의 시간을 저당 잡힐 것인가?’
그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 있지만, 당신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른다. 당신이 꿈꾸는 미래와 그가 지키려는 현재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당신은 그의 궤도를 벗어나, 당신만의 시간 위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함께 표류할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미래를 향해 홀로 헤엄쳐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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