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사진첩을 넘기다 결혼 전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카메라를 보고 웃는 남편, 그 옆에서 세상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 요즘의 두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다.
사진 속 그는 세심했다.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약을 챙겨왔고, 늦은 밤의 긴 이야기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말투를 기억했으며,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도 여러 번 했다. 그 시절의 친절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힘들었다는 말조차 눈치를 보며 꺼낸다. 남편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고, 서운함을 설명하면 결론은 엉뚱한 곳에 도착한다. 예민한 아내, 만족할 줄 모르는 여자, 집안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같은 남자에게서 나온 서로 다른 두 얼굴.
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사는 아내들이 오래 붙드는 것은 현재의 냉대보다 과거의 온기다. 분명 따뜻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차가움을 진짜 모습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기억 속의 그가 언젠가 돌아올 것 같아 좀처럼 희망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묻게 된다.
다정했던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변한 것과 드러난 것은 다르다
결혼 뒤 무심해지는 일 자체가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매일 함께 살다 보면 연애할 때의 긴장감은 옅어지고, 애정 표현도 전보다 투박해진다. 그렇다고 익숙함이 무시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표현은 줄어들어도 존중은 남아 있어야 한다. 다툰 뒤 상대의 아픔을 돌아보고, 자신이 지나쳤다면 사과하며, 불편한 말을 듣더라도 상대의 인격까지 깎아내리지 않는 것. 이것이 친밀함이 오래된 자리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태도다.
한 사람이 결혼 뒤 차가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나르시시스트 남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반복되는 방식이다.
밖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친절하지만 문이 닫히면 아내를 하찮게 대하고, 상처를 지적받으면 미안함보다 자신이 공격당했다는 분노를 먼저 꺼내는 사람. 잘못은 그가 했는데 대화가 끝날 때쯤에는 상처받은 쪽이 사과하고 있다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단순한 성격 차이로만 보기는 어렵다.
결혼이 그를 바꾼 것이 아니라, 더는 감출 필요가 없다고 여긴 태도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연애할 때의 애정이 모두 연기였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진심이었을 수 있으며, 남편 역시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향한 것이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나르시시스트 남편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상대에게 강하게 이끌린다. 늘 감탄해주고, 부족한 부분까지 이해하며, 자신의 요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주는 아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사랑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처음의 당신은 그 거울 속에서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좋은 면을 먼저 보았고, 힘든 사정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이해했으며, 작은 상처는 실수라고 넘겼다.
생활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피곤한 날에는 웃을 수 없었고, 부당한 요구에는 싫다고 말해야 했으며, 남편의 선택과 다른 의견도 생겼다. 한 사람의 아내이기 전에 욕구와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그는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라며 변한 쪽을 당신으로 지목한다.
그 말의 속뜻은 어쩌면 이것에 가깝다.
‘예전처럼 나를 중심에 두지 않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은 시절이 발목을 잡을 때
나쁜 날만 이어진다면 판단은 오히려 쉬워진다. 문제는 가끔 좋은 날이 돌아온다는 데 있다.
모진 말을 쏟아낸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피를 건넨다. 며칠 동안 침묵으로 밀어내다가 갑자기 미안하다며 안아주고,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을 꺼내면 연애 시절의 목소리로 돌아와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 짧은 온기가 지난 시간을 흔든다.
‘아직 예전의 그가 남아 있구나.’
그 하루를 증거로 삼아 남은 몇 달을 견디기도 한다. 차가움 사이에 드문드문 끼어드는 친절은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게 만들고, 아내는 다시 사랑받기 위해 말투와 표정, 행동을 고쳐나간다. 남편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모습을 찾느라 자신의 마음은 점점 뒤로 밀린다.
그러나 간혹 돌아오는 친절이 반드시 변화의 증거는 아니다. 관계를 잃을 것 같을 때만 나타났다가 안심하는 순간 다시 사라진다면, 그것은 사랑의 회복보다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고리에 가깝다.
과거에 따뜻했다는 사실이 내일도 따뜻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니다.
사과보다 생활을 보아야 한다
나르시시스트 남편은 아내가 정말 떠날 것 같을 때 놀라울 만큼 빠르게 예전의 얼굴을 되찾기도 한다. 눈물을 보이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으며, 자신에게도 상처가 많아 그런 행동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거짓인지 밝혀내는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한순간의 진심과 한 사람을 안전하게 사랑할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는 극적인 화해 장면보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서 확인된다. 아내가 거절했을 때 며칠 동안 벌을 주듯 침묵하지 않고, 잘못을 지적받아도 말꼬리를 잡아 공격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미안하다고 했던 행동이 실제로 줄어드는가.
사과는 한 장면으로 끝나지만 변화는 생활 전체를 바꾼다.
반대로 용서가 늦다며 아내를 몰아붙이거나, 자신의 상처를 앞세워 피해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며칠간 잘해준 것을 근거로 과거의 일을 더는 꺼내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문제의 중심은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다정한 얼굴이 돌아왔는지가 아니라 존중이 돌아왔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의 진심보다 선명한 것
남편이 왜 달라졌는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는지, 자신을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 결혼이 남긴 변화는 이미 아내의 몸과 생활에 기록되어 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어깨가 먼저 굳는다. 짧은 문자 하나를 보내면서도 여러 번 지웠다가 다시 쓰고, 친구를 만나는 일마저 남편의 표정을 살핀 뒤 결정한다. 예전에는 쉽게 선택했던 일 앞에서 자신이 없어지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옳고 그름보다 어떻게 해야 화를 피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한다.
이 정도에 이르렀다면 질문은 그가 어떤 진단명에 해당하느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이 결혼 안에서 존중받고 있는가.
싫다는 말을 해도 안전한가.
이 사람 곁에서 나는 점점 나다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지고 있는가.
폭언과 협박, 경제적 통제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더 잘 설명해서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 자신의 안전과 외부의 도움을 먼저 준비해야 한다. 사랑은 한 사람이 계속 작아져야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꿀 때
사진 속 남편이 거짓이었다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의 따뜻한 순간도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의 일부였으며, 당신이 사랑을 믿었던 마음 역시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가장 좋았던 기억 하나가 오늘의 현실을 대신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을 판단할 때 필요한 것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아니라 가장 자주 반복되는 태도이므로.
오랫동안 당신은 다정했던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왔다.
이제는 다른 질문을 꺼내야 한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디까지 밀려나 있었을까.
돌아와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래 미뤄둔 당신이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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