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테라스 카페에 마주 앉은 주말 오후. 며칠을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당신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서운했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지난번 당신의 생일날, 그가 보였던 무심한 태도와 차가운 말투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다.

당신의 조심스러운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

그 순간, 사과를 받았는데도 전혀 후련하지가 않다. 오히려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진다. 분명 ‘미안하다’는 단어가 들렸는데, 이상하게 존중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묘한 패배감마저 든다. 기분이 풀리기는커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찝찝함. 당신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건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의 탈을 쓴 교묘한 책임 전가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즐겨 쓰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관계의 독약과도 같은 완벽한 가짜 사과다. 진정한 사과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포함되어야 한다.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해서 상처를 줬네, 미안해”가 정상적인 어법이다.

하지만 저들의 사과에는 ‘나의 잘못된 행동’이 교묘하게 빠져 있다. 대신 ‘너의 예민한 감정’을 문제의 원인으로 슬쩍 밀어 넣는다.

  • “내 행동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난 당당하지만, 네가 유별나게 상처를 받았다니 그 감정 상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해 줄게.”

이것이 저 문장에 숨겨진 서늘한 속뜻이다. 자신이 상처를 준 가해자라는 사실은 쏙 빼버리고, 당신을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상처받고 오해하는 예민한 사람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사과의 형식을 빌려 당신의 감정을 깎아내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기가 막힌 말장난인 셈이다.

대화를 강제로 종료시키는 마법의 주문

이 가짜 사과가 더 악질적인 이유는, 상대방의 입을 완벽하게 틀어막는다는 데 있다. “미안하다”는 단어를 무기처럼 던져놓고 대화의 판을 강제로 닫아버린다.

여기서 당신이 찝찝함을 견디지 못하고 “근데 아까 말투는 왜 그랬어?”라고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려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반격한다.

  • “아니,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과했는데 왜 자꾸 사람을 피곤하게 달달 볶아?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힌다. 그는 ‘쿨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한 관대한 어른’이 되고, 당신은 ‘사과를 받아주지도 않고 과거의 일에 집착하며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히스테릭한 연인’으로 전락한다.

당신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기는커녕, 도리어 사과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옹졸한 가해자가 되어 그를 달래야 하는 기이한 상황에 놓인다.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늪

이런 가짜 사과가 반복되면 당신의 내면은 서서히 병들어간다. 분명 내가 상처받을 만한 상황이었는데도, 자꾸만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말을 하도 듣다 보니, ‘내가 또 오해했구나’, ‘내가 너무 예민해서 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구나’라며 자책의 방향을 돌린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말을 꺼내기가 두려워진다.

어차피 진짜 사과는 듣지 못할 테고, 결국 내가 이상하고 꼬인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끝날 싸움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은 입을 꾹 닫고 혼자 감정을 삭이는 법을 택한다. 당신의 속은 썩어가는데, 그는 자신의 완벽한 논리로 갈등을 잠재웠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건강하게 부딪히고 조율해야 할 연애가, 일방적으로 당신의 감정을 묵살하고 억누르는 통제실로 변해버린 거다.

가짜 사과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때

당신의 서운함은 정당했다. 당신의 감정은 결코 오해나 예민함에서 비롯된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행동을 꼬집었는데 감정을 탓하며 빠져나가는 비겁한 변명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마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찝찝한 사과를 억지로 삼키려 애쓸 필요 없다.

  • “내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한 행동이 문제라는 뜻이야. 내 감정을 핑계로 네 잘못을 덮고 넘어가려 하지 마.”

단호하게 쳐내야 한다. 그가 다시 억울한 척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너그럽지 못하다며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흔들릴 이유가 없다. 자신의 잘못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비열한 말장난 뒤에 숨는 사람에게 당신의 귀한 진심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맑은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내가 잘못했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서늘하고 찝찝한 가짜 사과는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당신의 맑은 자존감을 지켜내며 당당히 일어서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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