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가는 왕국의 폭군을 대하는 법

노쇠함마저 무기로 삼는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서늘하고 우아한 거리두기

이빨 빠진 호랑이는 더 크게 짖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액정에 뜬 ‘엄마’ 혹은 ‘아빠’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당신의 미간은 자동적으로 찌푸려지고 가슴 한구석에는 돌덩이가 얹힌 듯한 답답함이 밀려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전처럼 힘차지 않다. 갈라지고, 떨리고, 약해져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날카롭다.

“너는 자식이 되어서 부모가 아픈지 죽는지 궁금하지도 않니?” “옆집 철수는 이번에 부모님 모시고 여행 갔다더라.”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 네 속이 시원하겠지.”

과거의 그들이 힘과 공포로 당신을 지배했다면, 늙어버린 그들은 이제 ‘죄책감’과 ‘연민’이라는 더 끈적거리는 그물을 던져 당신을 포획하려 든다. 당신은 혼란스럽다. 한때 당신을 벌벌 떨게 했던 그 거대했던 부모가 이제는 작고 초라한 노인이 되어 당신의 보살핌을 구걸하고 있다.

그 초라함에 마음이 약해져 다가가면, 그들은 여지없이 숨겨둔 발톱을 꺼내 당신의 상처를 후벼 판다. 늙은 나르시시스트는 결코 온화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숙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다. 그 악취 나는 노년의 인질극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싸우지 않고, 그러나 결코 지지 않고 이 질긴 악연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왕관을 뺏긴 왕의 히스테리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상실의 과정이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재앙이다. 그들이 평생 무기로 삼았던 외모, 체력, 사회적 지위, 경제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지탱하던 ‘나르시시즘적 보급품(공급원)’이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고, 자신의 말이 예전처럼 먹혀들지 않을 때, 그들은 극도의 불안과 분노를 느낀다. 그 분노는 어디로 향하는가. 바로 그들이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대상, 자식인 당신에게로 쏟아진다.

늙은 나르시시스트가 더 괴팍해지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힘없는 노인 취급을 받으니, 집 안에서라도 왕 노릇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들의 짜증, 비난, 끝없는 요구는 단순히 노망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봐! 나는 아직 중요한 사람이야! 나를 숭배해!”라고 외치는, 무너져가는 자아의 처절한 비명이다.

그들은 당신을 사랑해서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의 쪼그라든 자아를 풍선처럼 불어줄 유일한 산소호흡기이기 때문에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질병과 죽음이라는 최후의 무기

젊은 시절의 나르시시스트가 폭력과 고함으로 당신을 통제했다면, 노년의 나르시시스트는 ‘아픔’을 무기로 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질병을 과장하고 전시한다. “나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 “의사가 그러는데 나 얼마 못 산단다.”

이것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혹은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조종 기술이다. 당신이 바쁘다고 하면 그들은 아프다고 한다. 당신이 거리를 두려 하면 그들은 응급실에 실려 간다.

그들은 죽음을 담보로 잡고 당신의 시간과 감정을 갈취한다. 당신은 “그래도 부모인데,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할 텐데”라는 한국 사회 특유의 효도 강박에 시달리며 그들의 호출에 응한다. 하지만 병원에 달려가 보면 어떤가. 그들은 의료진에게 갑질을 하거나, 간병하러 온 당신에게 “물 떠와라”,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며 또다시 상전 노릇을 한다.

그들의 아픔은 진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전시하는 목적은 치료가 아니라 ‘관심(Attention)’이다. 그들에게 병원은 무대이고, 환자복은 의상이며, 당신은 그 비극적인 연극의 관객이자 조연이어야 한다. 이 기막힌 연극에 속아 넘어가 당신의 일상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벽과 대화하는 법: 그레이 락(Gray Rock) 기법의 생활화

그들과 싸우려 하지 마라. 논리로 그들을 이기려 드는 것은, 진흙탕에서 돼지와 싸우는 것과 같다. 당신만 더러워지고, 돼지는 그 상황을 즐긴다. 그들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거나 과거를 조작해서 말할 때, 당신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것이다. “엄마, 그게 아니잖아!”, “아빠, 그때는 나한테 그랬잖아!”

하지만 그 정정(訂正) 시도는 실패한다. 그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감정적 반응’이다. 당신이 화를 내고, 울고, 펄펄 뛰는 그 에너지가 바로 그들의 먹이(Supply)다. 당신이 반응할수록 그들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제 당신은 회색 돌덩이(Gray Rock)가 되어야 한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고, 단단한 돌멩이.

그가 비난을 퍼부을 때, 변명하지 마라.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가 아프다고 징징거릴 때, 동요하지 마라. “병원 예약해 드릴게요.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세요.” 그가 옆집 자식과 비교할 때, 화내지 마라. “철수 씨는 효자네요. 잘됐네요.”

영혼을 섞지 마라. 눈을 맞추되 초점은 흐리게 하라. 당신의 감정 수도꼭지를 꽉 잠가서, 단 한 방울의 감정도 그들에게 흘러가게 하지 마라. 당신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재미없어한다. 처음에는 더 날뛰겠지만, 결국에는 벽을 보고 소리치는 것에 지쳐 입을 다물게 된다. 이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효도는 하되, 마음은 주지 마라

그렇다면 연을 끊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나 도덕적 부채감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기능적 효도’와 ‘정서적 효도’를 분리하는 것이다.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 즉 병원비를 내주거나, 가끔 반찬을 챙겨주는 것. 딱 거기까지만 해라. 그것은 당신이 나중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하는 당신 자신을 위한 방어막이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당신의 비밀, 당신의 기쁨과 슬픔은 절대 그들과 나누지 마라. 그들은 당신의 기쁨을 질투하고, 당신의 슬픔을 조롱할 것이다. 부모를 부모로 보지 말고,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나 ‘성격 나쁜 직장 상사’로 대하라. 업무적으로 처리하고, 퇴근하면 잊어버려라.

집에 들어갈 때,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상상 속의 방호복을 입어라. “지금부터 나는 오염 구역에 들어간다. 어떤 독설도 내 피부에 닿지 않게 하겠다.” 그리고 나올 때는 그 옷을 벗어서 문밖 털어버려라. 이것이 정서적 거리두기다.

심리적 호스피스: 그들은 이미 죽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들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육체는 살아있지만, 당신과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부모는 애초에 없었거나 이미 소멸했다.

당신이 그토록 괴로운 이유는, 아직도 그들에게서 ‘인정’과 ‘사랑’을 바라는, 채워지지 않는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늙으셨으니 이제는 좀 변하지 않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까?”

단언컨대,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 희망을 버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당신은 자유로워진다.

죽은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죽은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다. 그들을 바라볼 때, ‘나를 괴롭히는 거인’이 아니라 ‘평생 자기 안에 갇혀 살다 가는 불쌍한 노인’으로 바라보라. 그 시선의 높이가 바뀌는 순간, 그들의 독설은 당신에게 닿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라. 그들의 무너져가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성벽을 허물지 마라. 그들은 그들의 지옥에서 살다가게 두어라. 당신은 당신의 천국을 지킬 의무가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