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불빛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청계천 산책로. 지인들과의 모임을 파하고 걷는 길,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멈춘다.
- “아까 다들 내 얘기 중간에 끊고 자기들끼리만 떠드는 거 봤어? 사람들은 항상 나를 만만하게 보고 내 진심을 무시해. 내가 너무 착해서 당하고만 사나 봐.”
당신은 당황스럽다. 당신이 기억하는 아까의 상황은 그저 흔하고 유쾌한 대화의 흐름이었을 뿐, 누구도 그를 무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았다.
누가 말하다가 끊기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고. 어느 모임에서나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배신을 당한 사람의 얼굴이다.
여기서 “아니야, 아까 다들 분위기 좋았잖아”라고 사실을 짚어주면 어떻게 될까.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신마저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가해자로 묶어버린다. 그 장면을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당신은 혼란스러움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인다.
그가 만들어놓은 ‘영원한 피해자의 세계’로 당신이 끌려 들어가는 순간이다.
평생 억울한 사람
내현성 나르시시스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각본이 있다. ‘나는 늘 선량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세상과 타인이 항상 나를 억울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이 각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들에게 피해자라는 자리는 수치가 아니다. 오히려 편하다. 자기가 겪는 모든 실패, 게으름, 관계의 마찰에 대한 책임을 바깥으로 던져버릴 수 있으니까.
회사에서 승진에 누락되면 ‘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사가 나를 시기하고 사내 정치가 썩었기 때문’이다. 연애가 삐걱거리면 ‘내가 이기적으로 굴어서’가 아니라 ‘네가 내 깊은 상처를 안아주지 못할 만큼 이해심이 부족해서’가 된다.
이 패턴을 잘 뜯어보면 구조가 똑같다. 원인은 언제나 ‘밖’에 있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 자신은 언제나 상처받는 여린 사람이고,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를 못살게 구는 존재여야 한다. 그래야 각본이 맞으니까.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게 있다. 이들이 진짜 억울해서 그러는 것 같냐는 건데, 아니다. 물론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본인에게는 진짜다. 그런데 그 감정의 재료가 되는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아무도 무시하지 않았는데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았는데 소외당했다고 해석한다. 감정은 진짜인데 근거가 가짜인 셈이다. 그래서 대응이 어렵다. “네 감정은 이해하는데,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어”라고 말하면, ‘내 감정조차 부정하냐’며 폭발하니까.
진실을 입맛대로 오려 붙이는 사람
이 각본을 유지하려면 현실을 편집해야 한다. 이들은 놀라울 만큼 그 편집에 능하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잘못조차 앞뒤를 잘라서 자기가 피해자인 버전으로 바꿔놓는다.
- “내가 어제 너한테 짜증 낸 건 미안해. 근데 네가 먼저 내 신경을 긁는 말투를 썼잖아. 나도 참다 참다 터진 거야.”
사과처럼 들리지만 본질은 남 탓이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가 아니라, ‘당신의 자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한 피해자’라는 이야기로 바뀌어 있다.
이런 편집이 한두 번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긴다. 문제는 이게 매일이라는 거다. 반복되면 당신의 현실 감각이 흐려진다.
분명 그 사람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대화가 끝날 때쯤이면 ‘그를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나의 부족함’을 탓하며 사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런 식이다. 그가 약속을 어겼다. 당신이 섭섭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요즘 내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것도 이해 못 해주냐”며 눈물까지 글썽인다.
약속을 어긴 건 그 사람인데,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 사람이고, 미안해하는 건 당신이다. 이 뒤집힘이 어떻게 가능한지 당신도 모른다.
그냥 대화가 끝나면 항상 그렇게 되어 있다. 나중에 혼자 돌이켜봐야 “뭔가 이상한데”라는 느낌이 올라온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내기가 어렵다.
집어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재배열하는 거다. 거짓말은 들키면 끝이지만, 사실의 순서를 바꾸고 맥락을 빼면 “그건 사실이잖아”라고 되받아칠 수 있다.
당신이 신경을 긁는 말투를 쓴 적이 있는 건 사실일 수 있다. 다만 그게 먼저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 ‘먼저’를 슬쩍 빼버리면,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다.
당신의 일상이 사라지는 과정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가리키는 세상의 나쁜 사람들 편에 서지 않으려 애쓴다. 그를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를 같이 욕해주고, 그를 무시했다는 친구들을 함께 미워한다. 그 여리고 상처받은 사람의 유일한 이해자가 되어주려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는다.
그런데 그가 가리키는 나쁜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바뀐다. 이번 달에는 직장 상사. 다음 달에는 학교 동기. 그다음 달에는 자기 가족. 한 명이 해결되면 다른 한 명이 등장한다. 당신이 위로하고 달래고 편을 들어줘도, 끝나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거다.
서서히, 당신의 일상이 사라진다. 당신이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고 와도 위로받을 틈이 없다. 그가 느끼는 억울함의 크기가 항상 당신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도 오늘 좀 힘들었어”라고 꺼내면, 그는 5초쯤 들어주다가 자기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래? 근데 나는 말이야…” 그 접속사 ‘근데’가 나오는 순간, 당신의 하루는 증발한다.
이런 관계에서 오래 지내면 이상한 감각이 생긴다. 자기 감정을 느끼는 게 사치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는 거다. 나도 힘든데, 저 사람이 더 힘들어하니까 내 건 별거 아닌 것 같다.
나도 울고 싶은데, 저 사람이 먼저 울고 있으니까 내가 참아야 할 것 같다. 자기 감정에 순번을 매기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순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 각본을 고쳐주려 하지 않는 게 낫다
이 사람이 쓴 각본은 당신의 사랑이나 설득으로 바뀌지 않는다. 당신보다 그 피해자의 자리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한다기보다 그 자리가 없으면 자기가 무너진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하느니, 평생 억울한 사람으로 살며 타인의 마음을 짜내는 편이 훨씬 견딜 만한 거다.
당신이 아무리 진실을 알려주려 해도, 결국 당신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목록에 올라갈 뿐이다. 처음에는 ‘유일한 이해자’였던 당신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가해자가 된다. 그 전환은 놀라울 만큼 빠르다.
당신은 이 사람 곁에서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운 거다. 떠나면 이 사람이 무너질 것 같고, 그 무너짐의 책임이 나한테 있는 것 같고,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질 사람을 두고 가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다. 그 생각이 당신을 붙잡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당신이 없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무너질까. 아니다. 새로운 이해자를 찾는다. 그리고 당신은 ‘자기를 버린 사람’ 목록에 추가되어, 새로운 이해자 앞에서 꺼내 쓰는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전 여자친구도 결국 날 버렸어. 나는 항상 이래.” 그 문장 안에서 당신은 가해자가 되어 있다. 당신이 쏟아부은 시간, 눈물, 에너지는 그 이야기에 한 줄도 남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차피 떠나도 남아도, 이 사람의 각본 안에서 당신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살면 된다. 그 눅눅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억울함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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