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고통을 동일시
사랑은 따뜻하고, 평화로우며,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경험이라고, 세상은 말한다. 교과서에서, 영화에서, 혹은 행복해 보이는 타인의 SNS 속에서 ‘사랑’은 언제나 구원의 다른 이름처럼 반짝인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왜 늘 아픈가? 왜 당신의 관계는 평온한 항해가 아니라, 아슬아슬한 절벽을 타는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가?
당신은 어쩌면, 그 고통과 불안함조차 사랑의 일부라고, 아니,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의 격렬함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왔을지 모른다.
지독하게 다투고, 그의 차가운 등 뒤에서 눈물 흘리고, 그러다 그가 건네는 아주 작은 다정함에 모든 것을 용서하는 그 패턴. 당신은 그 안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당신은 스스로를 탓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유별날까?’, ‘나는 왜 안정적인 관계를 지루해하고, 나를 파괴하는 사람에게만 끌리는 걸까?’
나는 여기서 단언컨대, 그것은 당신의 취향이 유별나서도, 당신의 의지가 나약해서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이 가진 ‘사랑의 교과서’가, 그 첫 장부터 잘못 쓰였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의식중에 펼쳐보는 그 낡은 교과서의 첫 문장은, 비극적이게도, ‘사랑은 고통이다’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그 교과서는, 당신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 당신의 생존을 책임졌던 그 손에 의해 집필되었다.
최초의 교과서: 고통이 사랑의 언어가 되는 방식

아이는 생존을 위해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이자,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는 최초의 선생이다. 아이의 뇌는 스펀지와 같아서, 부모가 보여주는 모든 것을 사랑의 정의로 흡수한다.
문제는, 그 선생이 사랑과 함께 고통을 가르쳤을 때 발생한다.
1. 예측 불가능한 온기: 일관성 없는 사랑
아이가 울 때, 어떤 날은 부모가 즉각 달려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똑같이 울어도 부모는 냉담하게 방치하거나, 오히려 “시끄럽다”며 화를 냈다. 아이의 세상은 혼돈에 빠진다. 사랑을 받는 유일한 규칙은 ‘규칙이 없음’이 된다.
- 학습된 정의: 아이는 이 혼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고 배운다.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부모의 기분을 끊임없이 살피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결과: 아이의 내면에는 ‘사랑 = 극도의 불안과 긴장’이라는 공식이 새겨진다. 사랑받고 있다는 안정감이 아니라, 언제 이 사랑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 자체가, 그에게는 사랑의 증거가 되어버린다.
2. 안전 기지의 배신: 사랑과 학대의 공존
더 비극적인 경우는, 아이에게 위로가 되어야 할 부모가, 동시에 공포의 원천이었을 때다.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혹은 통제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를 상상해보라. 아이는 자신을 때리고 모욕하는 그 부모에게, 동시에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생존을 위해 다가가야 할 대상이, 동시에 생존을 위해 도망쳐야 할 대상이 되는 이 끔찍한 모순.
- 학습된 정의: 아이의 뇌는 이 모순을 견뎌내기 위해,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사랑과 고통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 결과: 그에게는 ‘아프다 = 사랑받고 있다’는, 상식적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신경 회로가 깔린다.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사람만이 나에게 유일한 관심을 주는 사람이며, 그 고통의 강도야말로 그가 나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의 척도가 된다.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그에게는 더 강력한 ‘관계 맺음’의 신호로 해석된다.
나는 이 과정이 단순히 ‘나쁜 기억’을 갖게 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경계 자체를 재조정하는 일이다. 그의 몸은, 그의 뇌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지루함’ 혹은 ‘단절’로 해석하고, 극도의 긴장과 고통,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아주 가끔의 보상(화해)을 ‘친밀감’과 ‘살아있음’으로 해석하도록 완벽하게 길들여진다.
성인의 비극: 낡은 교과서를 들고 현재를 읽다

그렇게, 사랑의 정의가 뒤틀린 채로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손에 든 교과서는 여전히 유년 시절에 쓰인 그 낡은 책 한 권뿐이다.
그는 이 낡은 지도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려 한다. 그 결과는 재앙적일 수밖에 없다.
1. ‘운명적 이끌림’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 재연
그는 왜 안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통제하려는 사람에게 속절없이 끌리는가?
나는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학적 이끌림(chemistry)’이나 ‘운명’의 정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익숙함’이다. 그의 무의식은,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그 ‘예측 불가능성’과 ‘고통’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 안정적인 사람: 나에게 일관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그의 교과서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 사람의 행동은 해석 불가능한 외국어처럼 낯설고, 그래서 ‘지루하다’. 이런 평온함은 그에게 사랑이 아니라 ‘관계의 부재’처럼 느껴진다.
- 불안정한 사람: 반면, 나를 뜨겁게 사랑한다고 했다가 다음 날 차갑게 밀어내는 사람. 나를 통제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감정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 이 사람은, 그의 낡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주인공’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의 무의식은 이 익숙한 고통의 신호 앞에서 외친다. “드디어 만났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다!”
그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연할 완벽한 파트너를 만난 것이다. 그는 잊고 있던 고향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그 익숙한 지옥의 풍경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2. 고통을 통한 ‘사랑의 증명’
그의 교과서에 따르면, 사랑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고통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 갈등의 목적: 건강한 관계에서 갈등은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지만, 그에게 갈등은 ‘관계 확인’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일부러 싸움을 걸고, 상대방을 극한까지 몰아붙이거나, 혹은 상대방의 폭력을 견뎌낸다.
- 화해의 중독: 그 지옥 같은 싸움 끝에 찾아오는 눈물의 화해, 그 순간의 격렬한 안도감. 이 과정은 학대 관계의 전형적인 패턴(긴장-폭발-화해)을 그대로 따른다. 그는 이 ‘화해’의 순간에 분비되는 강력한 쾌락 호르몬(도파민, 옥시토신)에 중독된다.
그는 평온한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통이라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얻어내는, 그 격렬한 ‘화해의 순간’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고통이 클수록, 화해의 카타르시스는 더욱 강력해진다. 그는 더 큰 사랑을 ‘느끼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고통을 필요로 하게 된다.
3. ‘구원’이라는 마지막 환상
이것이 아마도 가장 벗어나기 힘든 덫일 것이다. 그는 현재의 파트너를 ‘치유’하고 ‘구원’하려 애쓴다. “그도 사실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야. 나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이 구원자 서사가, 사실은 파트너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는 현재의 파트너를 성공적으로 ‘바꿈’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그 비극적인 부모를, 그리고 그 안에서 무력했던 자기 자신을, 뒤늦게라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파트너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라는 실패한 전투에서, 뒤늦게라도 승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의 현재는, 그렇게 과거를 바꾸려는 부질없는 시도 속에 볼모로 잡혀버린다.

당신이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 고통인지 혼란스럽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 관계가 당신을 평화롭게 하는지, 아니면 소진시키는지.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지, 아니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지.
당신의 낡은 교과서, 그 첫 장에 쓰인 ‘사랑 = 고통’이라는 문장을 이제는 찢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생존의 각서였을 뿐이다.
새로운 교과서를 쓰는 일은 두렵고 낯선 일이다. 평온함이 지루함이 아니라 ‘안전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긴장감이 없는 관계가 ‘무관심’이 아니라 ‘신뢰’의 증거라는 것을, 뇌와 몸에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고통을 사랑으로 착각해야 했던 그 무력한 아이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교과서를 새로 쓸 힘을 가진 어른이다. 당신의 삶에서, 사랑은 더 이상 고통의 동의어일 필요가 없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나만 아는 상담소 프리미엄 콘텐츠 에서 더 깊이 있는 심리학적 조언을 확인하세요.
또한, 나만 아는 상담소 네이버 블로그 에서도 다양한 주제의 심리 칼럼을 만나보세요.
- 레이커즈(Rakers) 성착취 연애 상담사 징역 6년레이커즈(Rakers) 성착취 연애 상담사 징역 6년 지금까지의 과정 “운영자의 건강상의 어려움으로 레이커즈의 모든 콘텐츠 운영이 잠정 중단됩니다.” 현재 연애 상담업체 ‘레이커즈(Rakers)’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팝업 공지입니다…. 자세히 보기: 레이커즈(Rakers) 성착취 연애 상담사 징역 6년
- “술 취해 기억 안 난다”는 변명, 심신미약 아닌 ‘본성 표출’이다술 취해 기억 안 난다. 이건 분노 표출이다. 술 냄새와 고성이 오가던 밤이 지나고, 숙취와 함께 아침이 밝는다. 엉망이 된 방 안, 멍든 팔목을 보며 따져 묻는 당신에게 그는 머리를… 자세히 보기: “술 취해 기억 안 난다”는 변명, 심신미약 아닌 ‘본성 표출’이다
- 때리고 나서 안아주는 행위, 사랑이 아닌 ‘공포에 의한 조련’이다때리고 나서 안아주는 행위, 사랑이 아닌 ‘공포에 의한 조련’이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뜨거운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당신을, 방금 폭력을 휘두른 그가 갑자기 와락 끌어안는다. “미안해,… 자세히 보기: 때리고 나서 안아주는 행위, 사랑이 아닌 ‘공포에 의한 조련’이다
- 때리고 나서 우는 남자친구, 그 눈물이 ‘쇼’인 이유때리고 나서 우는 남자친구, 그 눈물이 ‘쇼’인 이유 한바탕 난리가 끝난 거실에는 무거운 정적만 감돈다. 깨진 물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당신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구석에 웅크려 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자세히 보기: 때리고 나서 우는 남자친구, 그 눈물이 ‘쇼’인 이유
- 의부증 테스트, 그녀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의부증 테스트: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집착인 걸까? 배우자(연인)가 당신의 휴대폰을 몰래 확인하나요? “어디 있었어?”, “그 여자가 누구야?”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나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늘 의심받고, 해명하고, 증명해야 하나요? 이 의부증… 자세히 보기: 의부증 테스트, 그녀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