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 기준법보다 ‘정(情)’이 앞서는 그 끈적하고 위험한 왕국에 대하여

면접장의 따뜻한 덫

면접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당신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을 것이다. 딱딱하고 권위적인 압박 면접을 예상하며 손바닥의 땀을 닦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을 맞이한 것은 예상외의 온기였다.

대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하고, 당신의 스펙보다는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다는 듯 부드러운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진다.

“우리 회사는 직원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가족입니다. 형, 동생, 언니, 동생 하면서 서로 챙겨주는 게 우리 사훈이에요.”

그 순간 당신의 뇌에서는 안도감이라는 이름의 엔도르핀이 돈다. 차가운 도시의 경쟁 사회에서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줄 울타리를 만났다는 착각, 이제 나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유아적인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당신은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당신은 몰랐다. 당신이 찍은 것은 근로 계약서가 아니라, 영혼을 저당 잡히는 노예 문서였다는 것을. 나르시시스트 리더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단어는, 당신을 사랑으로 품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법과 상식을 무력화시키고, 당신의 공과 사를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리겠다는 가장 섬뜩한 선전포고다.

가족 같은 회사, 경계선이 사라진 무법지대

가족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 가족은 계산하지 않는다. 엄마가 밥을 차려줬다고 해서 돈을 청구하지 않고, 아빠가 운전해 줬다고 해서 택시비를 내지 않는다.

가족은 희생을 미덕으로 삼고,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친밀함이라 부른다.

나르시시스트 오너가 노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들은 회사라는 공적인 공간에 가족이라는 사적인 프레임을 덮어씌운다. 이 프레임이 작동하는 순간, 당신의 정당한 권리는 ‘야박함’이나 ‘이기심’으로 둔갑한다.

야근 수당을 요구하면 “가족끼리 너무 계산적인 거 아니야?”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주말에 업무 전화를 안 받으면 “식구가 급한 일이 생겼는데 모른 척하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들은 당신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일을 돕는 것이라고 세뇌한다.

가족 같은 회사에는 ‘업무 분장’이 없다. 내 일과 네 일의 경계가 모호하다. 마케팅으로 입사했는데 사장님 텃밭의 고구마를 캐러 가야 하고, 디자이너로 들어왔는데 사모님의 김장을 도와야 한다.

그들은 이것을 ‘팀워크’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나르시시스트 가장의 수발을 드는 머슴 살이다.

법과 규칙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가장(리더)의 기분만이 헌법으로 군림한다. 당신은 직원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막내아들이 되어버린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관심이라 부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의 방문을 맘대로 열어젖히듯, 가족 같은 회사의 상사는 당신의 사생활을 난폭하게 침범한다. 그들은 그것을 ‘관심’과 ‘애정’이라고 포장한다.

회식 자리에서 당신의 연애사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기본이다. 부모님 직업, 집안 형편, 심지어 주말에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까지 보고해야 한다. 당신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 그들은 서운해한다. “우리가 남이야? 비밀이 왜 있어?”

이 정보 수집의 목적은 친목 도모가 아니다. 당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당신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더 험한 일을 시킨다.

당신이 외로움을 탄다는 것을 알게 되면, 회식과 야근으로 당신의 시간을 독점하며 심리적 의존도를 높인다.

당신의 스마트폰은 24시간 감시당한다. 그들의 카톡은 밤 11시에도, 일요일 아침 7시에도 울린다. 내용은 업무 지시일 수도 있고, 술 취한 하소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가 원할 때 너는 언제든 응답해야 한다’는 권력의 확인이다. 당신의 시공간은 그들에게 점령당했다.

감정적 학대의 합리화: 사랑의 매

가장 끔찍한 것은 학대의 방식이다. 차라리 비즈니스 관계라면 업무적인 질책으로 끝날 일들이,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인신공격으로 변질된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를 친동생처럼 아끼니까 이렇게 혼내는 거야.”

그들은 폭언과 고성을 ‘애정 어린 훈육’으로 둔갑시킨다. 당신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면, 그들은 당신을 속 좁은 사람 취급한다. 형이 동생 좀 나무랄 수도 있지, 아빠가 자식 좀 혼낼 수도 있지, 뭘 그렇게 꽁해 있느냐고.

이 논리 앞에서 당신은 반박할 언어를 잃는다. 화를 내면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는 것 같고, 참자니 속이 문드러진다.

나르시시스트 상사는 자신의 감정 쓰레기를 당신에게 쏟아부으면서도, 자신이 훌륭한 멘토이자 어른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있다. 그들에게 당신은 감정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샌드백이거나 감정받이 무녀다.

퇴사는 곧 배신이자 패륜이다

가족은 탈퇴할 수 없다. 혈연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 논리는 퇴사 과정에서 극단적인 파국을 부른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퇴사는 계약의 종료다. 하지만 가족 같은 회사에서 퇴사는 ‘가출’이나 ‘호적 파기’와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

당신이 퇴사 의사를 밝히는 순간, 인자했던 가장은 순식간에 복수심에 불타는 악마로 돌변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디 가서 잘 사나 보자.”

그들은 당신의 퇴사를 개인적인 배신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소유물이 감히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거나, 업계에 나쁜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하거나, 혹은 밀린 월급을 주지 않으며 몽니를 부린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극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마치 늙은 부모를 버리고 도망가는 패륜아가 된 듯한 기분에 시달린다. 그 죄책감이야말로 그들이 노리는 마지막 족쇄다.

그들은 당신이 나가는 문턱까지 따라와서 당신의 마음에 흉터를 남겨야 직성이 풀린다.

당신은 고아가 아니라 용병이다

이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당신은 부모를 찾으러 회사에 온 고아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노동력과 기술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화폐를 교환하러 온 프로페셔널이다.

건강한 회사는 가족 같지 않다. 오히려 ‘프로 스포츠 구단’에 가깝다. 명확한 계약 관계, 각자의 포지션에 대한 존중, 성과에 따른 보상,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깔끔함.

그 건조하고 서늘한 비즈니스 관계야말로 당신을 지켜주는 안전장치다.

리더가 가족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그가 리더십이 없다는 자백이다. 합리적인 시스템과 비전으로 직원을 이끌 능력이 없으니, 전근대적인 혈연주의와 정(情)에 호소하여 충성심을 구걸하는 것이다. 무능한 리더일수록 가족 타령을 한다.

진정한 존중은 경계선을 지키는 것에서 나온다. 당신의 사생활을 궁금해하지 않고, 퇴근 후의 시간을 건드리지 않으며, 노동의 대가를 정확히 화폐로 지불하는 상사.

그 심심하고 정 없어 보이는 상사가, 사실은 당신을 가장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사람이다.

일요일 밤, 당신의 위장이 꼬이는 이유는 내일 만날 사람이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일 또다시 연기(Acting)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가면을 쓴 그 기괴한 연극 무대로.

제발 그 집을 나와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가짜 아빠가 아니라, 정확한 월급 명세서와 정시 퇴근이다. 그 차가운 숫자들이 당신의 뜨거운 인생을 지켜줄 것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