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타인이 아닌 자신의 신체 부위로 인식하는 그 기이한 소유욕에 대하여

인형의 집에는 비상구가 없다

어린 시절의 앨범을 펼쳐본다. 사진 속 당신은 예쁜 옷을 입고, 잘 빗겨진 머리를 한 채,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모습은 행복한 어린아이기보다 정교하게 세팅된 마네킹에 가깝다. 카메라 렌즈 뒤에 서 있는 부모의 시선은 당신의 웃음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연출되었는가를 검사하고 있다.

당신은 기억한다. 당신이 원해서 입은 옷은 거의 없었다. 당신이 원해서 배운 피아노가 아니었다. 당신의 일기장은 검열당했고, 방문은 잠글 수 없었으며, 당신의 친구 관계는 부모의 입맛대로 재단되었다.

그 집에서 당신의 공간은 없었다. 물리적인 방은 있었을지 몰라도, 심리적인 영토는 단 한 평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신이 무언가를 숨기려 하면 그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가족끼리 비밀이 어디 있느냐는 말은 겉보기에 화목해 보이지만, 실상은 너의 속내를 낱낱이 내보여 통제받으라는 협박이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자녀는 세상에 내놓은 또 하나의 자신이다. 그들에게 자식은 독립된 영혼을 가진 타인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의 자아가 팽창하여 밖으로 튀어나온 혹, 혹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연장된 팔다리에 불과하다. 그 기이하고 숨 막히는 일체감이 당신의 유년 시절을 지배했다.

트로피 혹은 쓰레기통, 중간은 없다

그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온도가 없다. 오직 기능만이 존재한다. 당신은 그들의 삶을 장식하는 장신구이거나, 그들의 수치심을 받아내는 배수구여야 했다.

당신이 학교에서 상을 받아오거나,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들은 기뻐한다. 동네방네 전화를 돌리고, 친척들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당신은 그 순간 사랑받는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라. 그들의 주어는 언제나 ‘나’였다.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다. 나의 유전자가 훌륭해서 네가 잘난 것이다. 나의 희생과 지원이 없었다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 아니라, 그들의 옷깃에 달린 번쩍이는 훈장이 된다. 그들은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유능함을 사랑했다. 당신은 명품 가방과 다를 바 없었다. 들고 다니면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내 가치를 높여주니까 아끼고 닦아준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실패하거나,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은 돌변한다. 단순히 실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혐오한다. 당신의 실패를 자신의 인생에 오물이 튀은 것처럼 모욕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야.” “너 때문에 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이 비난 속에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걱정은 없다. 오직 흠집 난 자신의 체면에 대한 분노뿐이다. 당신은 순식간에 진열장 속의 트로피에서, 분리수거함에 처박힌 쓰레기가 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물건을 대하는 태도다.

투사라는 이름의 폭력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감을 자식에게 투사한다. 이것은 매우 은밀하고 정서적인 학대다.

자신의 학벌에 콤플렉스가 있는 부모는 자식의 성적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아이가 공부를 힘들어하면,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과 분노를 느끼며 아이를 쥐잡듯이 잡는다. 그것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뚫린 구멍을 아이라는 반죽으로 메우려는 시도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는 부모는 딸의 외모를 통제한다. 살을 빼라, 쌍꺼풀 수술을 해라, 옷을 그렇게 입지 마라. 딸을 자신을 대신해 무대에 세울 아바타로 꾸미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할 때다. 자신이 게으른데 자식에게 “너는 왜 이렇게 게으르니”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이기적인데 자식에게 “너밖에 모른다”라고 호통친다.

내면의 그림자를 인정할 힘이 없는 그들은, 그 혐오스러운 오물을 자식이라는 스크린에 덮어씌우고 돌을 던진다. 당신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내 팔다리가 나를 거역할 때의 분노

당신이 사춘기를 겪으며 자아를 찾기 시작할 때, 집안은 전쟁터가 된다. 보통의 부모에게 자녀의 독립은 시원섭섭한 성장의 과정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자녀의 독립은 ‘신체 절단’과 같은 공포와 분노를 유발한다.

생각해보라. 내 오른팔이 갑자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밥상을 엎는다고.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나겠는가. 그들은 자녀의 독립 선언을 딱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머리 좀 컸다고 엄마(아빠)를 무시하는 거니?”

그들은 당신의 의견 차이를 ‘반역’으로 규정한다. 당신이 방문을 잠그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의 통제권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죄책감이라는 밧줄을 던져 당신의 발목을 묶는다.

“내가 널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 “너 없으면 나는 죽어.”

이 질척거리는 호소는 사랑이 아니라,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한 주인의 채찍질이다. 그들은 당신이 독립된 인격체로 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이 영원히 덜 자란 아이, 자신의 손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무력한 존재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신들이 계속해서 신(神)으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소리야.” 하지만 경계선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침략이다. 피부가 맞닿아 있는 포옹은 따뜻하지만, 피부를 뚫고 들어와 장기까지 만지려 드는 것은 수술 아니면 고문이다.

그들은 당신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연인 관계에 간섭하고, 진로를 맘대로 결정하면서 그것을 관심이라고 포장한다. 당신이 불편함을 호소하면 “가족끼리 뭔들 못 해?”라며 당신을 예민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 혼란 속에서 당신은 ‘나’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감정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엄마의 감정이었고, 내 꿈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아빠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신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왔다. 당신의 인생은 단 한 번도 당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당신은 그들의 거대한 연극 무대에 강제로 캐스팅된 소품이었을 뿐이다.

탯줄을 끊는 칼을 들어라

이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내 팔다리가 독립된 인격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 당신은 죽을 때까지 소유물이다.

이 질긴 운명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부모가 쥐고 있는 가위를 기다리지 마라. 그들은 절대 탯줄을 자르지 않는다. 당신이 직접 칼을 들어야 한다.

물리적인 거리를 둬라. 경제적으로 독립해라.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그들을 해고해라. “나는 당신들의 트로피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의 감정 배설구가 아닙니다.”

그들이 서운해하고,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불효자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 비난을 견뎌내라. 그것은 당신이 나쁜 자식이라서 듣는 욕이 아니다.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노예가 듣는 최상의 찬사다.

당신은 부모의 확장판이 아니다. 당신은 고유한 우주를 가진 단독자다. 그 당연한 진실을 찾기 위해 당신은 너무 오래 아팠다.

이제 그들의 거울이 되기를 멈추고, 당신 자신의 얼굴을 마주해라. 처음에는 그 얼굴이 낯설고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당신이다. 그 초라한 진짜가, 화려한 가짜보다 백 번 낫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