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많아서챙겨주고 싶었다는 당신에게
늦은 밤, 전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가라앉아 있다. 평소보다 느릿한 말투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나 전 연인에게 크게 배신당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는 사람을 잘 못 믿어. 진심을 줘도 결국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먼저 밀어내게 돼.”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책임감이 고개를 든다. 다른 사람들은 미처 몰라준 이 사람의 깊은 슬픔을 내가 안아주면 어떨까. 내가 변함없는 애정을 쏟으면 이 굳게 닫힌 마음도 결국 열리지 않을까.
기꺼이 그의 다친 마음을 돌보는 다정한 보호자를 자처한다. 헐은 마음에 약을 발라주고 밤새 곁을 지키며 다독이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끝을 알 수 없는 소진의 시작이다.
상처를 면죄부로 쓰는 사람들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과거의 아픔을 고백하는 방식은 일반인과 완전히 다르다. 보통 사람에게 상처는 굳이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흉터에 가깝다. 이들에게 상처는 언제든 불리한 상황에서 꺼내 쓸 수 있는 만능 프리패스다.
- “나는 버림받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어. 그러니까 네가 항상 내 옆에 있다는 걸 증명해 줘.”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던지는 말이다. 숨은 뜻은 서늘하다. ‘내가 어떤 이기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너는 나를 이해하고 절대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방적인 통제다.
동정심을 담보로 잡고 자기 마음대로 관계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억지에 불과하다.
상처가 많아서 서툴다고 굳게 믿어버린다.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갑자기 불안해하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한없이 약해진다.
불안해서 저러는 거니까 내가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줘야지. 그 결연한 다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의 발목을 옥죈다.
모든 잘못이 내 탓으로 둔갑하는 마법
이들과의 연애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피곤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거나 답장이 늦어지면 이들은 귀신같이 과거의 상처를 끌고 와 눈앞에 던져놓는다.
- “너도 결국 예전 사람들처럼 나를 지겹다고 생각하겠지. 변할 줄 알았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비난을 쏟아낸다. 당신이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네가 감히 내 연락을 기다리게 하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당장 납작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라’는 윽박지름이다.
억울한 마음에 해명을 시작하는 순간 이미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든 거다.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왜 어쩔 수 없이 늦었는지 증명하느라 진을 뺀다. 대화가 끝날 때쯤이면 상황은 완전히 뒤집혀 있다.
애초에 별일도 아니었는데 당신은 그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건드린 무자비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상처라는 명분을 앞세워 상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리는 솜씨가 기가 막힌다.
갈증을 채워주려 소금물을 마시는 연애
어느새 헌신적인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그가 우울해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곁을 지킨다. 짜증을 내면 아이 달래듯 다 받아준다. 노력하면 언젠가 저 상처가 아물고 온전한 사랑을 돌려줄 거라 믿으며 버틴다.
마실수록 갈증만 심해지는 소금물을 들이켜는 연애다. 애정을 퍼부을수록 그는 더 큰 증거를 요구한다. 한 번 져주면 다음에는 두 번 져주길 바라고, 오늘 밤을 새워 위로해주면 내일은 더 깊은 우울을 들고 찾아온다.
그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결핍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볍게 채울 수 있는 깊이가 아니다.
그들은 애초에 상처를 극복할 마음이 없다. 상처가 나아야 할 아픔이 아니라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받게 해주는 벼슬이라고 여긴다. 다 나아버리면 더 이상 무조건적인 이해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진다.
끊임없이 자신의 흉터를 헤집어 피를 내고 보여주는 이유다. 나 아직 아프니까 더 무리해서 나를 챙기라고 시위하는 거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아픔
관계가 길어질수록 서서히 지쳐간다.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온통 그의 감정 상태만 신경 쓴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는 친구 만나서 놀 기분이 나니?”
직접적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숨을 푹푹 쉬거나 어딘가 아픈 척을 하며 뒷덜미를 잡는다. 서운함의 표현이 아니다. ‘내 기분이 나아지기 전까지 너도 감히 행복해선 안 된다’는 물귀신 심보다.
당신이 문을 나서면서 무거운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즐거운 자리에서도 온통 자기 걱정만 하기를 원한다. 결국 스스로 일상을 축소하고 그 사람의 우울한 지붕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챙겨주고 싶다는 선의로 시작한 일이 삶 전체를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진 거다.
보호자의 유니폼을 벗어던질 때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고 보듬어주려는 마음은 귀하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졌기에 기꺼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예쁜 마음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다.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책임질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니다. 챙겨주고 싶었다는 착각에서 이제는 빠져나와야 한다.
매일 그의 눈치를 살피고 감정의 찌꺼기를 받아내느라 정작 당신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당신은 그 사람을 고칠 수 없다. 쏟아부은 시간이 아까워서 더 버텨봐야 돌아오는 건 더 큰 요구와 이유 없는 원망뿐이다. 평생을 억울함 속에서 타인의 에너지를 뜯어먹으며 살아가는 생존 방식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은 챙겨줘야 할 여린 아이가 아니다. 상처를 핑계로 당신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기적인 어른일 뿐이다.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겠다는 보호자 노릇은 여기서 끝내는 게 낫다. 그 상처는 애초에 당신이 낸 것도 아니고, 당신이 책임지고 아물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안해하며 뒤돌아볼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의 몫인 우울을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문을 닫고 나오면 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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