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이 꽤 재미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아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해주었고, 연애를 하면서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장면들이 계속 등장했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혼자 있으려 하고, 여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을 풀려고 한다는 설명을 읽으면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싸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복잡했던 연애가 갑자기 단순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책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면 싸움을 줄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꽤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설정도 재미있는 비유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관계를 상담하고, 나르시시스트와 회피적인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 책이 예전처럼 읽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남았다.
왜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 사람은 주로 여자일까?
남자가 동굴로 들어가면 기다려야 한다는 말
이 책에서 잘 알려진 설명 가운데 하나가 있다.
남자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동굴’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그를 억지로 끌어내려고 하지 말고 기다려주라는 취지다.
물론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은 있다.
남자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즉시 이야기하기보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서 대화하는 편이 더 건강한 사람도 있다. 문제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 자체가 아니다.
그 설명이 어디까지 확장되느냐가 문제다.
연락을 끊어버리는 사람.
갈등이 생기면 며칠씩 사라지는 사람.
상대가 서운함을 이야기하면 대답하지 않고 피하는 사람.
관계를 정리할 생각은 없으면서 자신이 필요할 때만 다시 나타나는 사람.
이런 행동까지도 어느 순간 “남자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원래 질문은 이랬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행동해도 괜찮은가?”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바뀐다.
“내가 남자를 너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행동을 평가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나는 상담 현장에서 이 장면을 여러 번 본다.
상대가 명백하게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데도 내담자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남자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요?”
상대가 몇 날 며칠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말한다.
“제가 너무 재촉한 건 아닐까요?”
상대가 자신의 감정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다시 묻는다.
“제가 조금 더 기다려줬어야 했을까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가 한 행동보다 내가 얼마나 좋은 연인이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가 불편해졌다.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행동을 면책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혼자 있으면서 감정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정리한다. 누군가는 갈등을 바로 해결하려 하고, 누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관계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차이를 이해하는 것과 상대의 행동을 감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누군가 갈등 상황에서 혼자 있고 싶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금은 감정이 너무 올라와 있어서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오늘 저녁에 다시 이야기하자.”
이 사람은 거리를 두고 있지만 관계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무 말 없이 연락을 끊고, 상대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며칠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을 단지 ‘남자의 동굴’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의 행동을 볼 때 성별보다 먼저 다른 것을 본다.
이 사람이 관계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혼자 있고 싶은 것은 괜찮다.
하지만 상대를 방치한 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감정을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계속 상처받는 상황에서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개인차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말이 가진 이상한 힘
이 말은 참 편하다.
남자가 연락을 잘 하지 않는다.
“남자는 원래 연락을 귀찮아해.”
감정 이야기를 피한다.
“남자는 원래 감정 표현을 잘 못해.”
갈등이 생기면 사라진다.
“남자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상대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데 해결책만 말한다.
“남자는 공감보다 문제 해결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런 설명 하나하나는 특정 사람에게 어느 정도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설명으로 묶이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남자의 부족한 관계 행동은 ‘남자의 특성’이 되고,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여성의 반응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되기 쉽다.
그러면 관계에서 변화해야 할 사람은 묘하게 정해진다.
- 그를 이해해라.
- 기다려라.
- 말하는 방식을 바꿔라.
- 요구하지 마라.
- 압박하지 마라.
필요한 것을 부드럽게 요청해라.
물론 상대에게 요구를 전달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의사소통 기술을 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다루는 설명서가 된다.
나는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불편하다.
건강한 관계라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용법을 익혀야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해한다는 말은 때로 아주 위험하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오히려 관계에서 오래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상대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고,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고,
상대가 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고,
왜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도 이해한다.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준 행동까지 이해하려 한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전 연애에서 크게 상처를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원래 감정을 표현하는 집안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 설명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배경이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꼭 하나를 분리해야 한다.
이해는 설명이지 면죄부가 아니다.
한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 행동을 계속 견뎌야 할 이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상대가 회피적인 이유를 이해하는 것과, 상대의 반복적인 잠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상대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과, 내 감정이 계속 무시되는 관계에 머무르는 것도 다르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이해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오래 관계에 갇힌다.
우리는 정말 다른 행성에서 왔을까
나는 이제 ‘남자는 화성, 여자는 금성’이라는 비유를 예전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차이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성별에 따라 다른 사회적 기대를 받으며 자라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다르게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남자를 하나의 행성에 넣고 모든 여자를 다른 행성에 넣어버리면, 그 안에서 훨씬 더 큰 개인차가 사라진다.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하는 남자도 있다.
갈등이 생기면 끝까지 대화하려는 남자도 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여자도 있다.
감정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여자도 있다.
관계에서 보이는 행동은 성별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섞여 있다.
어떤 애착을 형성했는지, 어린 시절 갈등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책임을 지는 태도를 배웠는지, 타인의 감정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관계에서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나는 이제 이런 것들이 훨씬 궁금하다.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지금은 왜 다르게 보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완전히 아무 가치도 없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흐려진다.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가 분명히 있다.
연애에서 우리가 느끼는 혼란을 아주 쉽게 설명했다.
복잡한 갈등에 이름을 붙여줬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위안을 주기도 했다.
그 위안이 필요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쉽게 이해되는 설명이 언제나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설명이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순간도 있지만, 같은 설명이 누군가의 부당한 행동을 견디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나는 지금 그 경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남자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말 때문에 당신이 계속 버려진 기분을 참아야 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남자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로 당신의 감정이 매번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차이를 이해한다는 말이 한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려 한다.
‘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는 말은 어디까지 괜찮을까.
떠났다가 돌아오는 남자를 ‘고무줄’이라고 설명하면 우리는 무엇을 놓치게 될까.
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감정 노동은 한쪽에게 더 많이 요구되었을까.
그리고 30년 전에는 사랑을 이해하는 지혜처럼 보였던 설명들을 지금의 관계 심리로 다시 바라보면 무엇이 달라질까.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서 관계를 배우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익혔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릴 필요까지는 없다.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 ‘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 는 말이 여자에게 미친 영향“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라는 말이 위험해지는 순간 이전 이야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다시 읽고 불편해졌을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아마 ‘남자의 동굴’일 것이다. 남자는 스트레스를… 자세히 보기: ‘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 는 말이 여자에게 미친 영향
-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다시 읽고 불편해졌을까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이 꽤 재미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아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해주었고, 연애를 하면서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장면들이 계속 등장했다…. 자세히 보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다시 읽고 불편해졌을까
- AI에게 연애 상담 받아도 괜찮을까?AI 연애 상담 받아도 괜찮을까?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친구에게 다시 전화하기에는 미안하고, 상담을 예약하자니 당장 답을 듣고 싶다. 결국 AI에게 상대와 나눈 대화를 붙여 넣고 묻는다. “이 사람이 아직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AI는… 자세히 보기: AI에게 연애 상담 받아도 괜찮을까?
- 연애 초반 잘해주던 사람이 변했다면, 마음이 식은 걸까?연애 초반 잘해주던 사람이 변했다면? 연애 초반에는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무슨 일이 있느냐며 먼저 물었다. 퇴근이 늦은 날이면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했고, 주말 약속은 며칠 전부터 정해두었다. 당신이 보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그가 만나러… 자세히 보기: 연애 초반 잘해주던 사람이 변했다면, 마음이 식은 걸까?
- 남자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에게 보이는 행동남자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에게 보이는 행동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연락이 늘고, 자꾸 만나고 싶어 하며, 사소한 변화에도 관심을 보인다고 말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런 행동은 호감이 있을 때도 나타나지만 외롭거나 심심할 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자세히 보기: 남자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에게 보이는 행동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