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동굴로 들어간다”라는 말이 위험해지는 순간

이전 이야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 다시 읽고 불편해졌을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아마 ‘남자의 동굴’일 것이다.

남자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생각을 정리하고, 여자는 그를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처음 들으면 꽤 그럴듯하다.

실제로 혼자 있어야 마음이 정리되는 사람이 있고, 감정이 격해진 순간에는 말을 계속 주고받는 것보다 잠시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갈등이 일어났다고 해서 두 사람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동굴에 들어간다’는 표현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그다음이다.

어디까지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건강한 거리두기이고, 어디서부터 관계를 회피하는 행동일까.

이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남자의 동굴’이라는 말은 관계를 이해하는 비유가 아니라 한 사람의 행동을 대신 설명해주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있다.


혼자 있고 싶은 것과 관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에게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싸움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잠시 대화를 멈출 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정리한 뒤 이야기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런 거리두기에는 대체로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관계가 끊기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 화가 나 있어서 말을 더 하면 서로 상처 줄 것 같아.”

“오늘은 조금 혼자 생각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면 좋겠어.”

“네가 한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니야.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 사람은 잠시 물러나지만 상대를 버려두지는 않는다.

대화가 언제 다시 이어질지 어느 정도 알려주고, 자신이 거리를 두는 이유도 설명한다. 상대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관계에서의 회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갈등이 생기자 갑자기 연락이 끊긴다.

상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묻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 설명이 없다.

그러다 자신의 감정이 편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상대가 그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이야기하면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니까.”

여기에서 문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을 얻기 위해 상대가 감당해야 할 불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은 상대의 행동보다 자신의 반응을 먼저 검토한다.

“제가 너무 몰아붙였나 봐요.”

“조금 기다려줬어야 했는데 계속 연락해서 더 멀어진 것 같아요.”

“남자는 원래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순간부터 관계의 초점은 이상하게 바뀐다.

사라진 사람의 행동은 사라지고, 기다리지 못한 사람의 잘못만 남는다.


기다림을 사랑이라고 배우면 생기는 일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 말 자체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림’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다.

상대가 감정을 표현할 때까지 기다린다.

책임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관계를 명확히 할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린다.

마음의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게 몇 달, 때로는 몇 년이 지나기도 한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계속 같은 말을 한다.

“조금만 더 이해해주면 달라질 거야.”

이때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한 사람이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관계에서 해야 할 몫까지 대신 감당하고 있는가.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기다려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힘들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로 관계의 약속을 마음대로 중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상처를 줘도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너무 쉽게 이해하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에는 훨씬 엄격하다.


회피형 애착이라고 모두 잠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회피형’이라는 이름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즘 연애 상담에서는 연락이 줄거나 감정을 말하지 않는 사람을 쉽게 회피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애착 회피가 높다는 것과 상대를 반복해서 방치하는 행동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회피적인 사람은 가까운 관계에서 부담을 느끼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상황을 불편해하거나, 갈등이 커지면 거리를 두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회피적인 사람이 잠수를 타거나 무책임하게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관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상대와 조율하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싸움이 나면 말을 못 하는 편이라 조금 시간이 필요해.”

라고 자신의 특성을 설명하면서도,

“그래도 네가 기다리는 동안 불안하지 않도록 연락은 할게.”

라고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회피 성향 자체가 관계를 파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제는 자신의 성향을 이유로 상대에게 모든 적응을 요구할 때 생긴다.

“나는 원래 연락을 잘 안 해.”

“나는 싸우면 말하기 싫어.”

“압박하면 더 도망가.”

“네가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돌아와.”

이 말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은 그 설명에 맞춰 살아가기 시작한다.

상대의 애착 유형을 이해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지식이 아니라 상대의 행동을 견디는 기술이 되어버린다.

나는 이 지점부터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회피형인가?

그 질문보다 먼저,

그 사람은 자신의 회피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고도 관계를 조정하려 하는가?

이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


“압박하면 도망가니까 가만히 두세요”

회피형 연애에 관한 조언을 보다 보면 이런 말을 쉽게 만난다.

연락하지 마라.

쫓아가지 마라.

감정을 요구하지 마라.

기다리면 돌아온다.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편안하게 대해라.

물론 상대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수십 통의 연락을 보내거나 계속 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조언에는 이상한 함정이 있다.

상대가 관계에서 보여주는 회피 행동은 그대로 둔 채, 그 행동 때문에 불안해진 사람의 반응만 수정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상담의 목표도 이상해진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도망가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나중에는,

“어떤 말을 해야 부담을 주지 않을까요?”

“며칠쯤 기다렸다 연락해야 할까요?”

“서운한 걸 말하면 또 사라질 텐데 말하지 않는 게 좋을까요?”

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당신은 연애를 하고 있는데 마음속에서는 계속 상대의 심리를 계산하고 있다.

이 말을 하면 도망갈까.

이 정도의 연락은 괜찮을까.

서운하다고 하면 부담스러워할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관계가 끝날까.

여기까지 오면 한번 다른 질문을 해봐야 한다.

그 사람이 떠나지 않도록 내가 계속 나를 줄여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지금 누구에게 편안한가.


동굴에는 출구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남자의 동굴’이라는 비유에서 가장 빠져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이것이다.

동굴에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려면 언젠가는 다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나왔을 때 해야 할 일이 있다.

왜 들어갔는지 이야기하고,

혼자 있는 동안 상대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듣고,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이야기하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함께 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어떤 관계에서는 이 과정이 없다.

갈등이 생긴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은 기다린다.

며칠 뒤 돌아온다.

분위기가 좋아진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뒤 똑같은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상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한다.

“그래도 헤어지려던 건 아니었나 봐.”

그러다 몇 번 반복되면 기다리는 쪽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진다.

문제를 꺼내는 횟수가 줄어든다.

서운함을 참고 넘어간다.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 말투를 계속 조심한다.

상대가 멀어진 것 같으면 자신의 행동부터 돌아본다.

이렇게 관계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은 불편하면 물러나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관계 방식처럼 굳어진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불안한 이유를 전부 ‘불안형’에서 찾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상대가 거리를 둘 때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쉽게 말한다.

“당신이 불안형이라 그래요.”

물론 애착 불안이 높은 사람은 상대의 거리두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불안을 개인의 애착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며칠씩 사라진다.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지 않는다.

관계를 계속할 것인지 물어도 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관계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의 행동은 그대로 둔 채,

“당신은 왜 그렇게 불안해하나요?”

라는 질문만 계속 던지면 문제가 다시 개인에게 돌아간다.

나는 당신이 자신의 애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버림받는 상황에 특히 민감한 이유를 알면 관계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동시에 살펴야 한다.

내 불안 가운데 어느 부분은 과거의 상처에서 오고, 어느 부분은 지금 이 사람이 실제로 불안정한 관계를 만들고 있는가.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좋은 상담은 한쪽만 보지 않는다.

당신의 불안을 이해하면서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환경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같이 본다.


이해는 상대를 붙잡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회피적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에게 나는 가끔 질문을 바꾸고 싶어진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돌아올까요?”

보다,

“그 사람이 돌아온 뒤 어떤 관계를 원하나요?”

를 묻고 싶다.

돌아오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중요한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사람은 돌아올 수 있다.

외로워서 돌아올 수도 있고,

당신이 그리워서 돌아올 수도 있고,

관계의 안정감이 필요해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관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다시 같은 갈등이 생겼을 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들을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려 하는지.

나는 오히려 이런 것을 보고 싶다.

사랑은 누군가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횟수로 확인되지 않는다.

돌아온 사람이 관계에서 무엇을 달리하려 하는지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남자는 화성에서 오지 않았다

남성이 여성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식의 설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을 모든 관계에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은 남자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

감정을 회피하는 방식도,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도,

상대의 마음을 대하는 태도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런 말을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

남자는 동굴에 들어갈 수 있다.

여자도 들어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혼자 있을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신의 동굴 앞에 최소한 작은 표지판 정도는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잠시 혼자 있고 싶지만, 우리 관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건강한 거리두기는 상대에게 이 메시지를 남긴다.

반대로 아무 설명도 없이 사라져놓고 상대가 기다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단지 남자의 본성이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 행동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회피일 수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일 수도 있고,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부족한 모습일 수도 있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계속 버려지는 경험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관계와 자신을 포기하면서 유지하는 관계는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남자는 원래 그렇다’는 설명 밖으로 나올 수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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