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의 종착지, 안정형이라는 섬

불안과 회피를 오가는 연애에 지친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제는 좀 평범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러나 막상 그들 앞에 그토록 원하던 ‘안정형’ 인간이 나타나면, 그들의 반응은 기묘하다.

안도감을 느끼는 대신 하품을 한다. “좋은 사람이긴 한데, 설레지가 않아.” “너무 밋밋해.”

우리는 그동안 사랑을 롤러코스터와 혼동해 왔다. 심장이 터질 듯 조여오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현기증만이 사랑의 증거라고 믿었다. 불안정한 관계가 주는 도파민의 낙차에 중독된 뇌는, 평온함을 ‘지루함’으로, 신뢰를 ‘매력 없음’으로 오역한다.

그러나 모든 폭풍우가 지나간 뒤, 난파된 배가 닿아야 할 곳은 결국 육지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안정형’이라는 곳은 지루한 유배지가 아니다.

그곳은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깊이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견고한 섬이다. 이 글은 그 낯설고도 단단한 섬에 닻을 내리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흔들리지만 부서지지 않는 땅

안정형 인간을 감정이 없는 로봇이나 무던한 돌부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슬퍼하고, 분노하며, 질투한다. 다만 그들은 감정이라는 파도에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평형수(Ballast Water)를 채우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상 항상성’이 그들의 내면을 지탱한다. 눈앞에 연인이 보이지 않아도, 잠시 연락이 두절되어도, 그들은 관계가 소멸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는 바쁜 것일 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라는 믿음이 굳건하기에, 그들은 불안에 잠식되어 상대를 닥달하거나 공포에 질려 동굴로 숨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아니다. 대신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늙은 나무와 같다. 당신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지어 당신이 그들을 밀어낼 때조차 그들은 일정한 온도로 당신을 대한다.

이 예측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구원이다. 우리는 그 단단한 땅 위에서 비로소 갑옷을 벗고, 가장 연약한 배를 드러내고 잠들 수 있다. 그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안전기지’다.

익숙한 지옥을 떠나 낯선 천국으로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 안전한 섬에 정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 양육자로부터 일관된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과거의 연애에서 상처받은 뇌는 평온함을 견디지 못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 강박’은 우리를 다시금 익숙한 전쟁터로 끌고 간다.

안정적인 파트너가 다가오면, 불안형은 “이 사람이 언제 변할지 몰라”라며 의심하고 시험한다. 회피형은 “이 사람이 나를 구속할 거야”라며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평화로운 관계에 고의로 파란을 일으켜 익숙한 위기 상황을 만들어내야만, 뇌는 비로소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다”며 안도한다. 스스로 행복을 걷어차는 이 비극적인 희극은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상영된다.

안정형이라는 섬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 본능적인 저항을 거스르는 고통이 수반된다. 뇌가 “재미없어”라고 외칠 때, 그것이 사실은 “안전해서 낯설다”는 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도파민이 주는 짜릿한 쾌락 대신, 옥시토신이 주는 은근한 온기를 견디는 근력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감각하는 뇌의 회로를 뜯어고치는 재활 훈련이다.

섬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안정형 파트너’를 만나면 자신의 모든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한다. 이것은 환상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을 만나도, 당신 내면의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관계를 기어이 망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을 지치게 해서 떠나보내거나, 당신 스스로 그들의 평온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갈 것이다.

결국 도달해야 할 결론은 하나다. 당신 자신이 먼저 안정형이라는 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획득된 안정 애착(Earned Secure Attachment)’이라 불린다. 타고난 기질이나 어린 시절의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노력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재양육할 수 있다.

나를 괴롭히는 불안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고 스스로 다독이는 법,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여 풀어내는 기술, 타인과 나 사이에 건강한 경계선을 긋는 연습. 이 지루하고 고단한 작업들이 쌓여 당신이라는 땅을 단단하게 다진다.

당신이 단단해지면, 비로소 타인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구원자를 찾아 헤매는 난민이 아니라, 지친 누군가가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주인이 된다.

혼자 건너기엔 너무 먼 바다

불안과 회피라는 낡은 뗏목을 버리고 안정이라는 섬으로 가는 항해는 멀고 험하다. 수십 년간 굳어온 마음의 습관은 시시때때로 방향키를 돌려 다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나는 안 돼”, “사랑은 원래 아픈 거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당신을 유혹할 것이다.

이 항해를 혼자 힘으로 마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엉망이 된 나침반을 고쳐 줄 기술자가 필요하고, 폭풍우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항로를 잡아줄 노련한 항해사가 필요하다.

당신의 연애 패턴을 객관적으로 해부하고, 무의식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작업은 정밀한 지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제 낡은 지도를 덮고 전문가의 내비게이션을 켜라. 매번 같은 자리에서 좌초되는 당신의 배를 수리하고, 안전한 항로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당신이 겪는 지루한 비극을 끝내고, 비로소 평온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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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진 소장 저 | 북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