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역설, 멀어질 수록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우리는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주말 내내 붙어 있고, 분 단위로 카톡을 주고받고, 서로의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것을 친밀함의 척도라고 믿는다. 상대방이 화장실에 갈 때조차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가 답장을 보내주길 바란다. 틈이 생기면 불안해진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이 새어 나갈까 봐 겁을 먹는다.
하지만 틈이 없는 관계는 숨을 쉴 수가 없다.
꽉 쥐고 있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지나치게 밀착된 관계는 필연적으로 부서진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 됨’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독립성을 갉아먹는 기생(parasitism)에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멀어지게 되는 이 기이한 역설. 오늘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거리’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멀어져야 한다는 말이 궤변처럼 들린다면, 당신의 연애가 왜 매번 그토록 숨 막히게 끝났는지 돌아볼 시간이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 타오른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본 적이 있는가. 장작들이 너무 빽빽하게 붙어 있으면 불은 꺼진다. 장작과 장작 사이에 공기가 통할 틈이 있어야 불길이 솟구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에스터 페렐(Esther Perel) 같은 심리학자들은 욕망이 ‘결핍’과 ‘거리’에서 온다고 말한다. 당신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 24시간 내내 그와 연결되어 있다면 신비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
- “오늘 점심 뭐 먹었어?”
- “지금 어디야?”
- “누구랑 있어?”
이런 질문으로 그의 일상을 현미경 보듯 들여다보는 동안, 당신은 그에게서 ‘궁금함’이라는 매력을 거세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은 그에게 너무나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신이 편할지는 몰라도, 당신을 탐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상대의 말: “너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아. 우린 가족 같아.”
해석: “너한테서는 더 이상 성적인 긴장감이 안 느껴져. 지루해.”
당신은 이 말을 듣고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만 천만에. 그 말은 관계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너무 가까워서 더 이상 다가갈 곳이 없는 상태. 그것은 정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고슴도치의 딜레마, 찔리지 않고 온기를 나누는 법
쇼펜하우어는 인간 관계를 추운 겨울날 모여 있는 고슴도치들에 비유했다. 추위를 피하려고 서로에게 다가가면 가시에 찔려 아프고, 아파서 떨어지면 다시 춥다.
우리는 이 딜레마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당신은 상대에게 “더 가까이 와, 나를 꽉 안아줘”라고 요구하지만, 그 요구는 곧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상대를 찌른다. 당신의 의존과 집착은 상대의 살을 파고든다. 상대는 아파서 뒤로 물러난다. 그러면 당신은 “왜 나를 피하냐”며 더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달려든다.
건강한 관계는 이 아픈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거리’를 찾아낸 상태다. 서로의 가시가 닿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온기는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간격. 그곳에 머무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대가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싫어진 건가?’ ‘다른 사람이 생겼나?’ 온갖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그 말의 진짜 뜻은 이렇다. “나는 지금 내 가시를 다듬고 싶어. 그래야 너를 찌르지 않고 다시 안아줄 수 있으니까.”
그가 동굴로 들어갈 때, 그 입구에서 서성이지 마라. 그저 당신도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차를 마시면 된다. 그가 충분히 쉬고 나오면, 당신은 더 따뜻하게 그를 맞이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없어서 문 앞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순간, 당신은 그를 영영 동굴 속에 가둬버리는 간수가 된다.
분화(Differentiation), 따로 또 같이 서는 나무
심리학자 머레이 보웬은 이를 ‘자아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라고 불렀다. 타인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립된 자아를 유지하는 능력이다.
분화가 잘 된 사람은 연인의 기분에 전염되지 않는다. 연인이 우울해한다고 해서 같이 땅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그건 너의 감정이고, 나는 너를 지켜봐 줄게”라며 든든한 나무처럼 곁을 지킨다.
반면 분화가 안 된 사람은 연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뒤집어쓴다. 상대를 위로한답시고 함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서적 융합(Enmeshment)이라는 병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서 각자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가지 끝에서만 살짝 닿아 춤을 추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각자 흔들리지만, 뿌리가 엉켜 있지 않기에 서로를 넘어뜨리지 않는다.
당신은 그 없이도 행복해야 한다. 그가 없어도 주말이 즐거워야 하고, 그가 연락하지 않아도 당신의 하루는 바빠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 그 없이 잘 지낼 때, 그는 당신을 가장 갖고 싶어 한다. 당신의 독립성은 그에게 불안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보증수표가 된다.
빈 의자를 남겨두라
식탁 맞은편에 빈 의자를 하나 두어라. 그가 언제든 와서 앉을 수 있지만, 언제든 일어나 떠날 수도 있는 자리다. 그 의자에 그를 묶어두려 하지 마라. 밧줄로 묶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해서 곁에 있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 못해서 곁에 있을 뿐이다.
거리를 두는 것은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을 온전한 타인으로 존중하기 위해서다. 내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우주를 가진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그 약간의 서늘한 거리감이 관계를 신선하게 만든다.
이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라. 읽지 않음 표시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의 운동을 하라. 그 헐거워진 틈 사이로 비로소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것이다. 그 공기가 당신의 사랑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 것이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의 적막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고요함이 불안이 아니라 자유로 느껴지기까지는 꽤 오랜 연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 거리를 견디는 일이 혼자서는 너무 벅차다면, 지도를 가진 사람과 함께 길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건강한 거리는 배우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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