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적 학대.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는 순간…
어느 순간, 끈이 끊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사소한 비아냥거림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혹은, 당신의 기억을 또다시 멋대로 재단하는 그의 태연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난 수개월, 혹은 수년간 그 모든 것을 견뎌왔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당신의 내면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애써 외면해왔다. 하지만 그날, 그 순간, 당신 안의 무언가가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당신은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그릇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태어나 처음 내뱉어보는 거친 욕설이 당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혹은, 당신을 밀치는 그의 팔을 당신도 똑같이 밀쳐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공기가 변했다. 당신을 몰아붙이던 그의 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기묘할 정도로 침착하고, 심지어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말했다. “거봐, 네가 이렇게 폭력적이잖아.”, “드디어 본색이 나오네. 소름 끼친다.”, “나는 너한테 맞고 사는 사람이야.”
당신은 혼란에 빠진다. 방금 전까지 분명한 피해자였던 당신은, 순식간에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가 든 스마트폰 카메라가, 혹은 그의 서늘한 시선이, 당신의 폭발하는 모습을 ‘증거’로 채집한다.
이것이 바로 학대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역전극, ‘반응적 학대(Reactive Abuse)’다. 나는 이것이 결코 ‘쌍방 과실’이나 ‘서로 똑같은’ 싸움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당신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설계된, 가장 정교한 형태의 함정이다.
덫의 설계: 사냥감 몰이로서의 도발

이 비극적인 순간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해자의 치밀한 심리적 ‘사냥’의 결과물이다. 당신의 폭발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의 사냥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이 함정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1. 한계점을 향한 지속적인 압력
가해자는 당신이라는 현(絃)의 장력을 정확히 안다. 그는 그 현을 끊어뜨리기 위해, 매일 조금씩, 집요하게 나사를 조인다. 이 과정은 당신이 명확하게 ‘폭력’이라고 인지하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 무시하기: 당신이 하는 말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거나, 투명인간 취급한다.
- 비아냥거리기: 당신의 성취나 가치관을 ‘별거 아니네’라는 식으로 은근히 깎아내린다.
- 말 자르기: 당신이 의견을 말하려 할 때마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 가스라이팅: 당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당신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한 번에 터지는 폭탄이 아니다. 이것은 신발 속에 들어간 아주 작은 돌멩이다. 당신은 그 돌멩이 하나 때문에 당장 멈춰 설 수는 없지만,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내내 발은 상처 입고 피로 물들어간다.
그는 당신의 인내심과 자제력이라는 자원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이 ‘작은 돌멩이’를 멈추지 않는다.
2. 방아쇠의 설치와 격발
오랜 압력으로 인해 당신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당신의 뇌는 더 이상 정상적인 스트레스 반응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복합 트라우마(C-PTSD) 환자의 뇌처럼, 사소한 자극에도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과각성’ 상태에 돌입한다.
가해자는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당신의 가장 아픈 상처, 가장 민감한 방아쇠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그는 정확히 그곳을 누른다. 당신의 외모 콤플렉스, 당신 가족의 문제, 혹은 당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사소한 실수.
그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당신의 반응은 더 이상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영역이다. 그것은 지난 수년간 억눌려왔던 모든 고통과 모멸감,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영혼의 필사적인 비명이다. 당신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생존을 위해 반격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
3.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 (DARVO)
당신이 마침내 폭발했을 때, 가해자는 완벽한 연극배우로 돌변한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심리학자 제니퍼 프리드(Jennifer Freyd)가 명명한 DARVO라는 각본을 꺼내든다.
D (Deny) – 부정하기: “내가 뭘 어쨌다고?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는 자신이 수년간 당신을 몰아붙였던 모든 도발 행위를 깨끗이 부정한다.)
A (Attack) – 공격하기: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미쳤어.” (그는 당신의 반응 자체를 문제 삼으며, 당신의 인격을 공격한다.)
RVO (Reverse Victim and Offender) – 가해자와 피해자 뒤집기: “네가 소리 지르고 물건 던지는 것 좀 봐. 내가 너 때문에 무서워서 살겠어? 너야말로 폭력 가해자야.” (그는 당신의 ‘반응’을 ‘시작점’으로 둔갑시켜, 자신을 무고한 피해자로, 당신을 유일한 가해자로 완벽하게 역전시킨다.)
그는 이제 당신의 반응을 녹화하고, 녹음하고, 증거로 수집한다. 이 ‘증거’는 그의 손에 들린 무기가 된다.
그는 이 증거를 당신의 친구들, 가족, 심지어는 법정에서까지 사용하며 자신을 변호하고 당신을 매장하려 들 것이다. 그는 당신의 폭발을 통해, 이 지옥 같은 관계의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떠넘길 완벽한 알리바이를 확보한 것이다.
파괴적인 내면의 여진: ‘나도 괴물일까?’

가해자의 이 잔인한 연극이 성공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타격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쌍방 학대’라는 거대한 착각
나는 이 지점에서 그 어떤 모호함도 남기고 싶지 않다. 소위 ‘쌍방 학대(Mutual Abuse)’라는 개념은, 적어도 권력의 불균형이 명확한 학대 관계에 있어서는, 가해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가장 위험한 착각에 불과하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는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학대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힘의 불균형’에 기반한, 일방적인 ‘통제’의 시스템이다.
- 가해자의 폭력은, 상대방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선제적인 ‘수단’이다.
- 피해자의 폭력(반응적 학대)은, 그 통제 시스템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폭발한, 비의도적이고 방어적인 ‘결과’이다.
이 둘을 ‘쌍방’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수년간 고문당하던 포로가 마침내 간수에게 한 번 반항하며 침을 뱉었을 때, 그것을 ‘쌍방 고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논리적 기만이다. 반응적 학대는 학대의 시작점이 아니라, 학대의 끔찍한 증상 중 하나일 뿐이다.
죄책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가해자가 당신에게 씌운 ‘너도 똑같아’라는 굴레는, 그 어떤 물리적인 쇠사슬보다 강력하게 당신을 옭아맨다. 당신은 스스로의 폭력적인 모습에 충격받고, 자신의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이 죄책감은 당신의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 당신은 침묵하게 된다: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이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저도 소리 질렀어요.” 이 한마디가, 당신이 겪어온 모든 고통을 무효화시킬까 봐 두려워 입을 닫는다.
- 당신은 그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가해자는 이 죄책감을 이용해 당신을 협박한다. “네가 날 떠난다고?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생각 안 나? 너도 똑같은 가해자 주제에.” 당신은 그 관계를 떠나는 것이 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착각하게 되거나, 혹은 당신 같은 사람을 받아줄 곳은 이 세상에 그 사람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결국 당신은, 가해자가 만든 감옥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죄책감이 만든 감옥에 갇혀버린다. 이것이야말로 가해자가 의도한, 가장 완벽한 심리적 지배의 완성이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끈이 끊어졌던 그날의 당신을 떠올리고 있다면.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자책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소리를 지르고 그릇을 던졌던 그 순간은, 당신이 괴물이라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당신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그 모든 압력 속에서도 완전히 소멸되기를 거부한, 당신의 자아가 내지른 마지막 비명이었다. 당신은 인형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고 반응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치유는 당신이 완벽하게 순결한 피해자였음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다. 치유는 그 지독한 맥락(context)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나는 왜 폭발할 수밖에 없었는가? 나를 그 한계점까지 몰아붙인 것은 무엇이었는가?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왜 폭발했을까?”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폭발하게 만들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당신의 반응을 용서하되, 그 반응을 유도한 그를 용서하지 마라. 당신의 죄책감은, 당신이 아니라 그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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