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만든 형제간 경쟁, 편애와 차별의 심리학

가족이 모두 모인 저녁 식탁, 유난히 맛있는 반찬 접시가 슬그머니 한쪽으로 밀려간다. 엄마의 시선은 한 자녀에게 고정되어 있고,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차가운 침묵이나 은근한 핀잔이 떨어진다. “너는 어째 먹는 것도 그렇게 복이 없니.” 같은 사소한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힌다.

형제자매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타인이자,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서로를 지탱해 줄 유일한 혈육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형제 관계는 연대가 아닌 전쟁이다.

이 전쟁은 자연스러운 경쟁이 아니다. 엄마라는 절대 권력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아이들의 서열을 정하고, 사랑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미끼로 서로를 물어뜯게 만든 잔혹한 투기장이다.

어떤 자녀는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황금 아이(Golden Child)’가 되어 왕좌에 앉고, 다른 자녀는 가족의 모든 문제를 뒤집어쓰는 ‘희생양(Scapegoat)’이 되어 돌을 맞는다.

엄마는 왜 자식들을 차별할까? 왜 누구는 끔찍이 아끼면서 누구는 쳐다보기조차 싫어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수많은 딸들이 밤마다 베개를 적셨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불합리한 차별의 메커니즘을 해부하려 한다. 이것은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엄마의 통치 기술이었음을 밝히는 과정이다.

캐스팅된 배역, 황금 아이와 희생양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자녀는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그들은 자녀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능적으로 분류한다.

엄마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랑거리가 되며, 엄마를 가장 잘 따르는 아이는 ‘황금 아이’로 간택된다.

반면 엄마의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엄마의 통제에 순응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아이, 혹은 엄마가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만드는 아이는 ‘희생양’으로 지정된다.

이 역할 분담은 매우 작위적이고 고정적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남아 선호 사상과 결합할 때, 아들은 무조건적인 황금 아이가 되고 딸은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농장 일을 돕는 아들에게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퍼부으면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딸에게는 “얼른 시집이나 가라”며 구박하는 엄마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심지어 엄마는 “아들은 하느님을 영접해서 좋은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황금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엄마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한 꼭두각시다. 엄마는 그를 왕처럼 떠받들며 자신과 동일시한다.

반대로 희생양인 당신은 엄마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 즉 불안, 분노, 열등감을 쏟아붓는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강요받았다.

엄마가 당신을 미워한 것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엄마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당신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다.

삼각관계, 엄마의 교묘한 통치술

엄마가 형제간의 우애를 갈라놓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삼각관계(Triangulation)’다. 엄마는 자녀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고, 한 자녀를 통해 다른 자녀의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비교한다.

“네 언니는 이번에 승진했다더라. 너는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엄마는 황금 아이의 성취를 무기로 희생양을 공격한다.

반대로 희생양의 실수를 황금 아이에게 전달하며 “너는 쟤처럼 되면 안 된다”라고 경고한다. 이를 통해 엄마는 황금 아이에게는 우월감을, 희생양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준다.

이 과정에서 형제들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희생양은 사랑을 독차지한 형제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황금 아이는 말썽만 피우는 형제를 한심하게 여기거나 부모의 사랑을 뺏길까 봐 경계한다.

심지어 엄마는 자녀들이 서로 친해지는 것을 못 견뎌 한다. 둘이서 쑥덕거리는 꼴을 보지 못하고, 반드시 그 사이에 끼어들어 이간질을 한다.

자녀들이 연대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다. 모두가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엄마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생존 방식이다.

이러한 삼각 대화법은 수동적 공격성의 전형이다. 엄마는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라고 발뺌하지만, 그 말속에는 치명적인 독이 발려 있다.

그 독에 중독된 형제들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며 멀어진다. 결국 승리자는 오직 엄마뿐이다.

승자 없는 게임, 모두가 피해자였다

편애를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겉으로 보기에 승패는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이라는 무대 위에서 진정한 승자는 없다.

희생양인 당신이 평생 결핍과 자기 비하에 시달렸다면, 황금 아이인 형제는 평생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황금 아이는 자신의 본모습으로 사랑받은 것이 아니다. ‘엄마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서만 가치가 있었기에, 그들 역시 내면은 공허하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엄마를 돌보거나 엄마의 대리 배우자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힌다.

때로는 황금 아이였던 형제가 나중에야 이 기이한 가족의 역학을 깨닫고 당신에게 사과를 해오기도 한다.

“누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엄마랑 사이가 나빴어?”라는 동생의 뒤늦은 질문은, 그동안 당신이 겪은 고통이 망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어떤 자매는 엄마의 통제를 피해 정반대의 길을 걷기도 한다. 한 명은 과잉 성취자가 되어 엄마를 만족시키려 하고, 다른 한 명은 자포자기하여 삶을 방치한다.

행동 양식은 정반대지만, 두 사람 모두 내면 깊은 곳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사실 우리는 같은 감옥에 갇힌 동료 죄수였을 뿐이다. 간수(엄마)가 던져주는 빵 조각의 크기가 달랐을 뿐, 자유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엄마가 만든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기

이제 당신은 이 잔인한 게임의 규칙을 알아차렸다. 당신이 형제를 미워했던 것은, 그리고 형제가 당신을 외면했던 것은 서로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짜놓은 각본에 충실히 연기했을 뿐이다.

엄마의 편애는 당신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엄마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결정된 배역일 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왜 나만 사랑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그 답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권력으로 사용한 엄마의 병든 내면에 있다.

가능하다면 형제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라. 엄마라는 중계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하며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라.

물론 형제가 여전히 엄마의 꼭두각시로 남아 있다면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속에서는 그를 ‘경쟁자’가 아닌 ‘또 다른 피해자’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엄마가 만든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라. 누가 더 사랑받는지, 누가 더 인정받는지를 겨루는 그 소모적인 경쟁을 멈춰라.

당신은 누군가와 비교될 필요 없는 고유한 존재다. 엄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당신만의 화단을 가꾸어라.

그곳에서는 당신이 황금 아이도, 희생양도 아닌, 그저 온전한 당신 자신으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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